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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안에 최초로 인장한 조선 최고의 책거리 화가

이형록(李亨祿, 1808∼1883 이후)은 조선후기 최고의 책거리 화가다. 그가 책거리를 잘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유명한 화원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할아버지 이종현과 아버지인 이윤민 모두 책거리로 이름을 떨쳤다.

이윤민과 이형록 부자가 책거리에 능하였음은 유재건이 지은 ‘이향견문록’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화사 이윤민은 문방제구를 잘 그려서 사대부가의 병풍은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당시에 고묘하여 짝이 될 이가 없다고 일컬어졌다. 그의 아들 형록도 가업을 계승하여 정공이 극치에 이르렀다. 내게 여러 폭의 문방도병풍이 있는데 매양 방에 쳐놓으면 간혹 와서 보는 사람이 책들이 책꽂이에 가득 찼다고 여기다가, 가까이 와서 살펴보고는 웃었다. 그 정묘하고 핍진함이 이와 같았다.”

이형록은 조선시대 화가로는 드물게 두 번이나 개명을 했다.

57세인 1864년에 이름을 ‘응록(膺祿)’으로 바꾸더니 불과 7년 후 64세인 1871년에 다시 ‘택균(宅均)’으로 개명했다.

이 사실은 ‘승정원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화원이기 때문에 이름을 바꾸는 데도 임금의 허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이형록의 작품은 이름만 갖고도 대략 제작 시기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이형록이란 인장이 보이면 57세인 1864년 이전이고, 이응록이라면 1864년에서 1871년 사이이며, 이택균이라면 64세인 1871년 이후의 작품인 것이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품인 이형록의 ‘책가도’는 여덟 폭 병풍이다. 포갑에 싸인 책들이 빼곡하고, 향로와 합, 병, 주전자, 잔 등이 여기저기 그려졌다. 화면 왼편의 제1폭 맨 아래층에는 인장함이 있고, 그 안에 든 도장에 ‘이형록인(李亨祿印)’이라 새겨놓았다. 이렇게 은인(隱印)을 한 것은 이형록의 경우가 가장 처음 알려졌으므로 ‘책거리’ 하면 ‘이형록’으로 통할 정도였다. 궁중 책거리의 역사에서 보면 이형록이 앞서 보았던 장한종 보다 40년 연하이므로 장한종을 비롯한 선배 화원의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화면의 구도와 투시법의 구사, 기물의 묘사 등에서 장한종과의 유사점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반면 장한종이 기물의 윤곽선을 강조한 것에 비하여 이형록은 기물에 음영을 가하여 입체감을 더하는 등 서양화법의 구사가 강화됐다.

오늘날 국내외에 전하는 이형록의 책거리가 얼추 열 점이나 되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조선 최고의 책거리 화가’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 같다.

/글=박본수 경기도박물관 학예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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