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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n쉼]김창우"옹녀타령"

얄팍한 상혼에 색녀 전락했지만 남존여비 윤리관 굴레 거부하고 인간행복 찾아나선 의지의 여인

영국인들에게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이 있고, 독일인에게 괴테의 <파우스트>와 실러의 고전이 있고, 프랑스인에게 몰리에르의 희극들, 스페인 사람들에게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고전이 있는가? 나는 서슴없이 판소리 12마당을 손꼽는다. 그 중 6마당은 전해지지 못했고, 남은 6마당 중에서 유일하게 곡조가 전해지지 못한 마당이 <변강쇠 타령>, 일명 <가로지기 타령>이다.

우리들은 모두 변강쇠와 옹녀의 이야기를 엄청나게 정력이 센 남자와 색을 엄청나게 밝혔던 여자의 이야기쯤으로 알고 있다. 우리 선조 광대들이 창조한 해학과 골계의 금자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이, 한낱 싸구려 포르노 이야기 거리로 전락해버린 것은 국내 영화업자들의 얄팍한 상혼과 원작에 대한 무지 때문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상부살(喪夫煞), 즉 남편이 죽게끔 되어있는 살이 낀 운명을 타고난 옹녀는 지배자들이 요구하는 청상과부의 길을 택하지 않고 재혼에 재혼을 거듭한다. 황해도 땅에 남자 씨가 마를 것을 두려워하는 남정네들은 아무 죄도 없는 옹녀를 추방한다. 고향땅 황해도에서 추방당하는 불행한 여인 옹녀는 조금도 기가 죽지 않고 삼남 땅으로 향하다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로 뿌리 뽑힌 채 유랑하는 남자 강쇠를 만나게 되고, 이들은 지리산 자락의 화전민촌에 신접살림을 차리게 된다.

지리산 자락에 거처를 정했다는 사실은 요즘 식으로 풀이하면, 13평 아파트는 고사하고 변두리 달동네 단칸방 전세금도 마련할 길이 없어 대도시의 변두리에서 인근 소도시로, 다시 소도시에서 농촌으로 그리고 마침내는 오른 전세금을 원망하며 택지조성조차 안 되고 수도와 전기조차 없는 산속의 오지마을로 쫓겨 간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의 궁핍하고 찌들은 삶을 다루되, 판소리 광대들은 이를 활기차고 해학에 가득 찬 모습으로 묘사해 놓는다. 비극적 내용을 희극적으로 풀어내는 고도의 세련된 수법을 쓰고 있는 것이다. 옹녀의 행위 또한 차분히 따져 보아야 한다. 옹녀는 남편을 둔 채 외간남자와 놀아난다든가, 싫증나면 남자를 갈아치우는 방종한 여인이 결코 아니다. 옹녀의 남성관계는 남편과 아내로서의 테두리를 한 번도 벗어나지 않는다. 옹녀는 당시의, 아니 지금까지도 잔존하고 있지만, 남존여비적인 지배적 윤리관의 굴레를 과감히 벗어 던지며, 청상과부의 길을 거부하고 자신을 짓누르는 상부살(喪夫煞), 즉 남편이 죽게끔 되어있는 살이 낀 여자로서의 불행을 체념적으로 받아들이기는커녕,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행복을 찾아 도전에 도전을 거듭하는 의지의 여인이다.

강쇠가 온갖 노름과 술먹기, 그리고 싸움만을 일삼는 건달인 반면, 옹녀는 일을 하는 여성이다. 놀고먹는 강쇠의 가부장적 횡포 밑에서 들병이장사를 비롯하여 온갖 노동으로 가계를 꾸려가는 옹녀는 삶의 지혜를 터득한 여인이며, 남편에게 노동을 권장하는 근면한 여인이다. “밤낮으로 하는 것이 잠자기와 그 노릇뿐”이었던 알량한 남편 강쇠는 장승을 패다 땐 동티로 죽은 이후까지도 옹녀를 자신의 소유물처럼 독점하려 하지만, 이런 강쇠의 몹쓸 저주로 인해 늘어나는 송장처리를 위해 옹녀는 타고난 미모로 남정네들의 욕정을 부추길 줄 아는 현실적이고도 실용적인 삶의 자세를 지닌 여인이다. 치상을 마친 후에 같이 살자는 약속을 저버린 채 꽁무니를 빼고 마는 옹녀의 마지막 남자 뎁득이의 소심함에 비해, 무서움과 괴로움을 끝까지 견뎌내는 옹녀는 대담한 여인이다. 그리고 끝내 인간해방과 행복의 정착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조선팔도를 유랑했을 옹녀는 가련한 여인이다.

판소리 6마당 중에 유일하게 해피엔딩이 아니라 비극으로 끝을 맺고 있는 <변강쇠 타령>은 이제 <옹녀타령>으로 마땅히 제목을 바꾸어야 한다. 싸구려 포르노가 보여주는 옹녀의 모습은 나를 잠시 슬프게 만들지만, 우리 시대의 옹녀들은 지리산보다는 더 가까운 곳에서 오늘도 억세고 야무지게 삶을 헤쳐 나가고 있다. 이 땅의 뎁득이들도 마땅히 거듭 태어나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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