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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칼럼]‘하늘나라 계산법’

 

술자리에서 누군가 파지 값이 너무 떨어져 괜히 심란하다고 했다. 그의 동네 박스 줍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들었는데, 요즘 파지 시세가 작년 절반이란다. 그래, 파지 줍는 분들 참 많이 늘었어. 그 분들과 함께 할 일을 고민해야 하는 거 아냐? 돈 몇 푼보다 운동 삼아, 소일 삼아 나오는 분들도 많대. 겨끔내기로 한마디씩 했다.

묵묵히 듣는 동안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에 나오는 송이뿐(윤소정) 할머니가 떠올랐다. 박스를 줍던 이뿐 할머니가 해피엔딩을 맞았던가? 노인이라든가 할아버지 할머니 대신 ‘어르신’이라는 호칭이 일반화 된 지 오래건만, 왜 파지 수거하는 분들에게 어르신이라 하면 좀 어색하지? 자신의 얄팍한 휴머니즘을 반성하면서 막걸리 잔이나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돌아와 검색해 보니 정말 파지 가격이 많이 떨어졌다는 글이 여럿 보인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대략 상자는 ㎏당 30~50원, 폐신문지는 90~120원이라 한다. 지인의 말대로 2011년 평균의 절반 값이란다. 파지를 일부 원료로 하는 골판지업체들이 수거 파지의 수분과 오염 차감률을 크게 높였고, 이에 따라 중간수십상이 매입 단가를 낮췄기 때문이라고 했다.

파지를 줍는 어르신은 지난 5년 새 크게 늘어 이제는 200만명을 헤아린다. 수원시 인구 근 갑절이다. 이 분들이 하루 종일 거리를 헤매며 50㎏을 주웠다 해도 몇 천원을 손에 쥐기 어렵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런 젠장!

협동조합 운동을 오랫동안 해온 김기섭씨는 자신의 책 <깨어나라! 협동조합>에서 ‘하늘나라 계산법’이라는 근사한 표현을 썼다. 그의 깨달음은 마태복음 20장에 있는 ‘포도원 품꾼들’ 비유에 있다. 포도원 주인이 이른 아침, 오전 아홉 시, 낮 열두 시, 오후 세 시, 오후 다섯 시에 일꾼들을 자신의 포도밭으로 보내 일하게 하고, 하루를 정산할 시간이 되었을 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었다는….

한 데나리온은 번역 성경 주석에도 나와 있듯이 당시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이다. 한 데나리온을 벌면 온 가족이 하루를 먹고 사는 것이고, 못 벌면 굶어야 한다. 저녁 다섯 시까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품꾼들은 얼마나 애가 탔을까? 포도원 주인은 그들에게도 하루를 살아갈 품삯을 주었다.

자본주의 관점에서 보면 주인의 셈법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다. 자본의 논리로도, 노동의 논리로도 정당화되지 않는다. 자비로 설명하기엔 너무 형평에 어긋난다는 답변이 대뜸 돌아오리라. 그러나 ‘하늘나라 계산법’이라는 표현이 절묘하게 가슴을 울리는 이유는 바로 거기 있다.

“그러므로 예수의 하느님나라운동과 관련해서 볼 때도 이 비유를 탈성장주의적, 반팽창주의적 경제의 관점에서 읽는 것은 타당하다. 이 비유에서 더 얻을 수 있는 자기 몫을 포기하라는 요구는 파괴된 공동체적 삶을 회복시키고, 공동체 내의 약자들을 제일 먼저 배려하는 예수운동의 기본 원리와 일맥상통한다.…우리는 경쟁체제의 밑바닥에서 뒹구는 사람들도 인간다운 삶에 대한 욕구를 가진 구제적인 인간이라는 사실을 자주 잊어버린다.” (박경미, <마몬의 시대 생명의 논리>)

‘하늘나라 계산법’이 기독교의 틀 안에만 갇혀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불교의 자비심은 말 그대로 ‘하늘나라 계산법’이요, 유교의 인(仁) 역시 근본적으로 ‘하늘나라 계산법’을 권장한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 보는 입장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종교는 종교, 경제는 경제’라는 각박한 경제논리를 좇아 사는 우리들 마음속에도 ‘하늘나라 계산법’은 살아있다.

곳곳에서 마을만들기가 한창이다. ‘잃어버린 공동체’에 대한 향수, ‘이대로는 안 된다’는 절박함, ‘조금 더 윤택한 삶’을 향한 기대가 한 덩어리로 얽히고설킨 결과겠다. ‘함께 살자’는데 누가 반대할 것인가. 그러나 ‘밑바닥 사람들’을 기꺼이 껴안지 않는다면 참 마을이라 할 수 없다. 파지 줍는 어르신들도 당당한 마을 주민이 되게 하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복지라는 미명 하에 그 분들을 ‘고되고 천한 노동’에서 벗어나게 해 드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일할 곳이 없어 오후 다섯 시까지 장터에서 애태웠을 그분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드릴 방도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상상력을 열어놓고 온 마을이 함께 ‘하늘나라 계산법’을 궁리할 일이다.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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