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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칼럼]우리가 잘못 가르치는 것

 

1. 영상을 준비해온 분은 아주 어렵게 구한 거라고 했다. 뜻 맞는 이 몇이 모여 지역사회가 어떻게 함께 잘 살까를 궁리하는 자리였다. KBS 스페셜 <행복해지는 법> 1부 ‘대한민국은 행복한가?’. 2011년 1월에 방영된 프로그램인데 지금은 한국방송 홈페이지에서 볼 수 없단다. 왜요? 저작권 문제라나 뭐라나 막아놓았네요. 마침 예전에 그걸 받아놓은 분을 만나서 운 좋게 구했지요. 대한민국은 행복해지는 법을 시청하는 것조차 어려운가?

주로 교육에 초점을 맞춘 기획이다. 그 중의 한 장면. “아이들에게 어느 대학에 가면 졸업 후에 어떤 일을 하게 되고 연봉은 얼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알려주면 확실히 동기부여가 됩니다.” 교육 컨설팅 전문가로 소개된 발언자는 확신에 찬 어조였다.

2. 야근을 하고 밤 10시 넘어 귀가한 아들이 지나가는 말처럼 묻는다. “아버지는 왜 제가 학교 다닐 때 대기업 신입사원 연봉은 얼마고, 판검사가 되면 얼마를 받고, 의사가 되면 얼마를 번다는 얘기를 한 번도 하지 않으셨어요?” 아들은 대기업 협력업체 신입사원이다. 아들이 말을 한 적은 없지만 대기업과 협력업체 직원 간에 보수와 근로조건에서 어떤 차별을 받는지 왜 모르랴.

“내 일 하느라고 바쁘고 저녁에 술 마시느라 바빠서 그랬겠지. 너희들이 그랬잖아. 니들 어릴 때 기억나는 아빠 모습은 딱 두 가지라고. 술에 취해 있거나, 잠을 자고 있거나.” 웃으면서 눙치고 말았다. 대학 후배들 만나는 자리에서 이 에피소드를 말해 주었더니, 하나같이 내가 잘못 했다고 했다. 농반 진반이기는 했지만 자식에게 사회가 돌아가는 실상을 정확히 알려주는 게 맞는다는 거다.

3. 지난 늦가을 어느 인권센터 20주년 기념공연. 공들여 준비한 순서들이 거의 마무리되고, 활동가들의 사연이 영상으로 소개됐다. “선생님은 저희들에게 ‘너희들 공부 열심히 안 하면 시장통 배추장수밖에 할 게 없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학교를 그만 두기로 했습니다. 배추장수를 저렇게 가르치는 학교라면 더 배울 게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약관의 활동가가 털어놓은 야무진 말이 자막으로 떴다.

세 기억이 차례로 떠오른 건 본보 16일자 오피니언 <아침시 산책>에 조길성 시인이 소개한 심호택 시인의 시 ‘똥지게’ 때문이다. ‘우리 어머니 나를 가르치며/ 잘못 가르친 것 한 가지/ 일꾼에게 궂은 일 시켜놓고/ 봐라/ 공부 안 하면 어떻게 되나/ 저렇게 된다/ 똥지게 진다’ 1993년에 나온 심 시인의 <하늘밥도둑>에 실려 있다 했다. 조 시인의 짧은 해설마따나 “지금은 고인이 된 시인이 삶을 바라보던 깊디깊은 눈빛”이 느껴진다.

누가 옳은가. 교육 전문가인가, 젊은 인권활동가인가, 나인가, 내 후배들인가, 시인인가, 시인의 어머니인가.

기돗발 받는 자리라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찾아가, 자식 수능 점수 하느님이 부처님이 천지신명이 하실 수 있는 최고 수준까지 높여달라고 비는 이 땅의 어머니들을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당차게 학교 때려치우고 행복하게 인권 운동하는 젊은이는 칭찬받아 마땅하지 않을까. 물론 일에 바쁜 척 부모의 도리를 해태한 나는 좀 질책을 받을 여지가 없지 않다. 그래도 남들이 다 한다고 따라 하지 않은 게 비난거리는 아니지 않나.

한국 교육이, 한국 사회가 심한 자기 분열증을 앓고 있다는 진단이 내려진 지 오래다. 그런데 누구도 자신 있게 치료법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래서 한국 교육은, 한국 사회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점점 괴물이 되어 가고 있다.

대응법은 크게 세 가지 정도일 듯하다. 첫째, 과잉 순응.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대세를 더 열심히 따라가는 것이다. 행복? 개나 물어가라지…. 둘째, 플러그 뽑기. 동참할 수도, 동의할 수도 없는 구조로부터 과감하게 벗어나는 것이다. 잘들 해봐. 난 내 식대로 행복할 테니…. 셋째, 중심잡기. 교과서와 현실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면서, 요동 심한 버스에서 서 있을 때처럼 몹시 흔들리면서, 때론 멀미를 참으면서, 그래도 중심을 잡으려고 애쓰는 것이다. 그래도 언젠가는 세상이….

어느 게 옳은지 누가 알겠나. 그래도 무언가 잘못 가르쳐왔다는 걸 깨닫는 순간 그냥 넘어갈 순 없는 노릇이다. 듣기론 플러그 진작 뽑은 활동가는 요즘 행복하고, 아들은 오늘 아침 씩씩하게 출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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