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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칼럼]불산 누출과 <에린 브로코비치>

 

지지난 ‘불금’ 밤, 늦게 귀가했다가 우연히 <에린 브로코비치>를 보았다. 꽤 오래 전 본 영화인데, 괜스레 한 번 더 끝까지 보고 싶었다. 사흘 뒤 불산 누출사고 소식을 접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TV를 켰을 때 에린(줄리아 로버츠)은 변호사(앨버트 피니) 사무실에서 막 쫓겨나고 있었다. 거대 에너지 기업 PG&E가 힝클리 마을 주민들에게 몹쓸 짓을 저질렀다는 의혹을 파헤치러 1주일 사무실을 비웠다가 무단결근으로 해고당하는 장면. 전혀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사무실을 나서는 에린, 그러나 집에 돌아와 산더미 같은 청구서를 보며 절망하는 에린.

(줄리아 로버츠를 다시 봤다. 그녀는 이 영화로 2001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골든 글로브 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노 변호사역 앨버트 피니는 두 상 모두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하지만 에린은 이미 PG&E가 인체에 치명적인 6가크롬을 함부로 사용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손에 넣은 다음이었다. 변호사는 어쩔 수 없이 두 번 이혼하고 애가 셋인데다, 예쁘기만 할 뿐 거칠기 짝이 없는 에린을 다시 찾아온다. 그 자리에서 급여 100% 인상 약속을 받아내는 에린. 지화자!

에린은 이때부터 밤낮 없이 뛰어 6가크롬 때문에 치명적인 질병을 앓고 있거나 가족을 잃은 힝클리 주민 600여 명의 집단소송 동의를 받아낸다. 아직 젖먹이인 셋째까지 안고 수도국의 서류를 복사하고, 반신반의하는 주민들을 설득하는 에린. 중도포기하려는 변호사에게 고함을 지르며 맞선 덕에 소송을 제기하는 데 성공한다. 급기야 거대기업의 변호사가 찾아와 보상금 2천만 달러를 제시하지만 에린은 단박에 거절한다.

그런 그녀에게도 아픔이 닥친다. 아이들을 돌볼 새 없이 매달리는 에린에게 남자친구가 이별을 통보한 것. 그에게 에린은 이렇게 말한다. “가지 마. 알잖아.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다운 일을 하고 있어.” 그래도 그는 떠나고….

우여곡절 끝에 초거대기업 PG&E는 에린에게 굴복하고 만다. 배상금은 3억3천만 달러. 미국 역사상 최대의 소송이었다고 한다. 스티븐 소더버그가 실화를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변호사가 에린에게 보너스 200만 달러를 주는 익살스런 장면까지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에린 브로코비치>는 다윗 대 골리앗의 21세기 버전이다. 힘없는 여성, 초거대기업, 환경오염…. 영화는 재미있게 두 번 봤는데, 왠지 뒷맛은 개운치 않다.

우선 양심불량 초거대기업의 행태는 미국이나 한국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일단 거짓말로 주민들을 속이고 사실을 오도한다. 그 다음엔 서류와 관련 증거들을 인멸하며 은폐를 시도한다. 그래도 걸리면 본사는 몰랐던 일이라고 잡아뗀다. 어쩔 수 없으면 기만적인 금액으로 매수를 시도한다.

더 씁쓸한 대목은 미국과 한국의 다른 점이다. 우선 미국 사법부는 용기 있게 다윗의 손을 들어준다. 물론 한국의 사법부에도 그런 판사가 넘쳐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비슷한 유형, 비슷한 규모의 다툼에서 한국의 다윗이 이겼다는 소식은 들어본 기억이 없다. 내가 과문한가? 태안 기름 유출 사고의 결말을 떠올려 보라. 반례가 있다면 누가 좀 알려 주시라.

둘째, 에린은 200만 달러라는 거액 보너스를 받지만 한국 활동가들은 맨몸으로 싸워야 한다. 와중에 다치기라도 하면 자기 돈으로 치료해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감옥에 갈 각오도 해야 한다.

셋째, 한국에서는 내부고발자를 금기시하는 풍조가 여전하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에린은 PG&E 본사의 지시로 증거를 인멸한 인부의 증언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다. 하긴, 그도 오래 망설이는 걸 보면, 미국이라고 해서 ‘딥 스로트(deep Throat)’가 자주 나오진 않는가 보다. 그래도 한국보다는 많다. 힝클리의 수도국처럼 모든 기록을 철저히 보관하는 점도 미국이 한 수 위다.

그래서 미국이 부러우냐고? 아니다. 미국이건 한국이건 불량 골리앗이 정의롭게 다뤄지기를 바랄 뿐이다. 지난주 내내 불산 누출사고 소식을 접하면서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이 겨울에도 한국의 ‘에린’들은 누가 알아주건 말건 맨발이 부르트게 뛰고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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