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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정치]대통령의 약속

 

민무신불립(民無信不立). 백성의 신뢰가 없으면 나라가 바로 설 수 없다. 공자 정치철학의 요체로, 인구에 자주 회자되는 경구이다. 공자는 ‘정치가 무엇인가’라는 제자 자공의 질문에 대해 식량을 풍족하게 하고(足食), 군대를 충분하게 하며(足兵), 백성의 믿음을 얻는 일(民信)이라고 답하면서, 경제와 국방의 중요성과 함께 국민의 신뢰를 정치의 3대 요소로 꼽았다. 특히, 공자는 ‘이 셋 중에서 어쩔 수 없이 순서를 정해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먼저 버려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군사와 식량도 중요하지만 백성의 신뢰를 마지막까지 버려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 취임식이 열리는 아침, 덕담 대신 ‘공자님 말씀’부터 꺼내는 이유는 박근혜 정부의 성공을 위해 논어의 이 구절이 오늘에도 여전히 유효해 보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신뢰의 정치인’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며, 이런 점이 그의 가장 큰 정치적 자산 중 하나로 손꼽힌다. 박근혜 대통령도 당선인 시절 “내가 약속하면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대선공약 이행을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다. 민주통합당도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필자를 위원장으로 하는 대선공약실천위를 구성, 대화와 소통의 상생정치를 펼치겠다고 화답했다. 특히 큰 원칙에서 여·야 간 이견이 없는 공약이나 약간의 이견은 있으나 절충이 가능한 공약을 골라 우선 입법과제를 발표한 바도 있다.

이와 같은 분위기에서 경제민주화, 일자리 창출, 보편적 복지, 한반도 평화 등에 관해서는 구체적 실현방법에서 차이가 있더라도 국정 최우선 과제로 추진해야 한다는 원칙과 당위에서는 여·야·정 간에 커다란 이견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지난 주말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발표를 보면 경제민주화를 실천하겠다는 박근혜 정부의 의지가 실종된 것으로 판단된다. 인수위가 ‘국민행복, 희망의 새 시대’를 국정비전으로 선포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5대 국정목표, 21개 국정전략, 140개 세부과제를 발표했지만 그 어디에도 경제민주화의 ‘기역 자(字)’도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원칙이 바로 선 시장경제 질서 확립’이라는 표현이 ‘일자리 중심의 창조경제’라는 첫 번째 국정목표를 달성할 하위 전략으로 설정됐다. 중소기업 영역을 무차별적으로 파고드는 재벌들의 ‘지네발식 확장’을 규제하는 정책들이 몇 개 들어있지만 ‘경제민주화’라는 단어는 222쪽에 달하는 국정 비전 자료집에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와 관련, 인수위 관계자들이 “경제민주화 실천 의지와는 관계가 없다”고 강변하지만 이는 진실을 호도하려는 구차한 궤변에 불과하다. 벌써부터 동네 빵집, 세탁소, 커피전문점, 순대, 떡볶이 등 서민형 영세 업종의 골목상권을 무차별적으로 파고드는 재벌들의 탐욕적 행태에 눈감겠다는 뜻으로 읽힐까봐 우려가 앞선다. 경제민주화처럼 이해 관계자가 다양하고 조직적으로 반대하는 세력이 있는 사안이 국정목표에서 빠지게 된 이상 추진 동력을 급속하게 상실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해 여름 대선 출마선언과 후보수락연설에서 “경제민주화가 국민 행복의 첫걸음”이라며 일자리 창출과 한국형 복지의 확립과 함께 3대 핵심과제를 밝힌 바 있다. 대선공약집에서도 경제민주화를 국민행복 10대 공약에 포함시켰다. 그래놓고 새 정부가 출범하기도 전에 경제민주화를 천덕꾸러기 신세로 내팽개친 것은 국민과의 약속위반이다. 약속의 번복은 박근혜 대통령이 평소 강조해온 원칙과 신뢰의 정치에도 위배될 뿐만 아니라 국민의 실망을 불러 국정운영의 동력을 약화시킬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지난 대선에서 나타난 국민의 뜻을 제대로 읽어야 한다. 오늘의 박근혜 대통령을 만든 시대정신이 바로 경제민주화라는 점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대통령이 경제민주화 실천의지를 가지고 최우선 국정과제로 직접 챙겨야 한다. 늦었지만 오늘 취임사에서 경제민주화 추진 의지를 다시 강조한다면 새 정부의 순조로운 출발에 한결 힘이 실릴 것이라는 점을 조언하고 싶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민의 우려를 진심으로 수용하고 준비된 대통령의 면모를 보여주길 기대하며, 경제민주화 실종이 괜한 기우(杞憂)이길 바란다. 어떠한 경우에도 국민과의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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