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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시론]내 마음 속의 패거리 문화

 

얼마 전 자기 분야에서 나름 열심히 살고 계신 양식 있는 분들과 같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좋은 분위기에 한창 흥이 오를 무렵, 갑자기 어색한 상황이 생겼다. 내가 앞자리에 계시던 분이 듣고 싶어한 말 한 마디를 입 밖에 내지 않은 게 원인이었다.

서로의 관계가 돈독해지며 으쌰으쌰 하던 분위기는 나와 그 분 사이에 흐르는 냉기로 인해 점점 싸해졌다. 그분이 나에게 듣고자 했던 한 마디는 바로 ‘형님’이라는 호칭이었다. 자신이 한 살 더 많다는 사실을 몇 번씩 얘기하며 은근히 강조했는데도, 내가 주어를 생략한 대사를 계속 드리니까, 결국엔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는지 굳은 얼굴을 하고 다른 자리로 옮겨가버렸다.

그땐 이미 여러 차례 술잔이 오간 터라 속으로 ‘돈 들어가는 일도 아닌데 그냥 편하게 분위기에 묻어갈 걸 그랬나?’ 하다가도 동의할 수 없는 뭔가를 느꼈다.

가끔은 자신이 나이가 한두 살 많은데도 상대에게 형님이라고 먼저 불러주는 경우도 보았다. 주로 이해관계가 걸린 관계에서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몇 살 많은 을이 바람 앞의 풀처럼 바로 눕는 경우이다. 이처럼 형님이라고 대접해주고 나서 서로 속을 터놓는 친밀한 관계가 되어, 사적인 이야기에 사업 이야기 등을 섞어 나누며 상하관계를 만들어 간다.

당장의 이해관계가 아니더라도 동문이니 선후배니 따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런 식의 관계를 맺는 이유는 일단 사적인 인맥을 잘 형성해 놓아 나중에 공적인 관계에서 플러스알파를 얻자는 계산 때문일 것이다. 일종의 미래에 대한 투자개념인 것이다.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생활하면서 겪는 곤란함 중의 하나가 ‘한국의 인맥문화를 이해하고 그 속에 편입되는 노하우를 익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TV 토크쇼 ‘미수다’에서 본 기억이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이러저러한 인맥에 편입되지 않으면 외톨이가 되기 십상이다. 이렇게 맺어진 여러 형님동생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중심으로 뭉치면 패거리가 되는 것이다. 이런 패거리 이익집단은 자신들의 이해득실을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진영논리에 빠져 상식과 합리성에서 멀어지게 된다. 그들에게 중요한 포인트는 자신이 속한 진영에 속하느냐, 속하지 않느냐는 것뿐이다. ‘우리가 남이가? 형님, 언니’ 등 자신의 진영에 속해 있다면 모두가 형이고 동생이고 언니다. 즉 사적인 관계인 것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그런 사적 인맥을 유지, 확장하는 행태가 개인적인 이윤을 추구하는 장을 넘어서 대부분은 공리를 추구해야 되는 공적인 영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이다.

뜻밖에도 자신을 진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진영을 만들고 선후배를 따지면서 끼리끼리 뭉쳐 세력을 키우기도 한다. 지난 대선에서 진보진영이 패배하여 민주적인 정부가 들어서길 기대하던 국민들은 절망의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그런 좌절 속에서도 얻은 소득이 있다면 진보진영(민주당, 진보당 등) 정당들의 생얼을 보았다는 것이다. 요즘 제1 야당인 민주당이 거의 자해 수준으로 초라해져 가는 것도 조직 이기주의, 특히 민주당 주류인 친노의 패거리주의 때문이라고 많은 이들은 생각한다. 문희상 비대위원장은 일전에 워딩의 문제를 지적한 적이 있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친노’를 구분했으면 한다. ‘사익친노’와 ‘공익친노’.

장유유서, 선후배 문화, 연고주의 같은 인맥문화, ‘형님 동생’처럼 수직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끼리끼리 문화’를 개선하지 않고서는 선진문화를 기대할 수 없다.

힘 있는 사람에 줄서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개발독재 토목건설의 시대가 지나고, 개개인의 자발성과 창조성이 중요시 되는 시대가 된 지 오래다. 올바른 관계에 기초한 사람들의 집단이 중요한 시대가 된 것이다. 인맥문화를 버려야 한다. 다양성과 공존의 시대 아닌가?

패거리문화의 오랜 구습을 개선시키는 일을 정치권에만 기대하지 말고,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이 먼저 행동하자. 인맥을 만들어가는 근원인 형님 동생문화를 근절하고 집안의 경조사를 아주 가까운 지인끼리만 최소화 시켜 치르는 운동이 확산되길 바란다. 내년 지방선거에서 이런 공약을 들고 나오는 지자체 단체장이나 의원이 있다면, 나는 입에서 단 내 나도록 발품, 말품을 팔아가며 지지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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