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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n쉼황진이, 내 오랜 거울 속의 그녀

 

봄이다. 조선의 기생에 대한 특강 의뢰가 시작되는 계절이기도 하다. 봄철의 빛, 즉 ‘춘색’이 가득한 봄은 청춘의 정욕, 즉 ‘춘정’의 계절이 아닌가. 특강을 하면서 매번 받는 질문이 있다. “왜 하필이면, 기생의 연구를 시작했는가?” 인문학의 연구는 대부분 관심 분야의 확대를 통해서 논의가 확장된다. 따라서 처음 출발한 지점에서 멀어질수록 뒤를 돌아볼 기회도 점점 줄어든다. 인터뷰나 특강을 할 때마다 매번 반복된 질문에 기억을 더듬어본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고교 시절에 대학생 누이의 책상 위에 아무렇지 않게 던져져 있던 시화집 한 권이 떠오른다. 혜원의 기생 그림이 선명한 시조시화집이었다. 그날 이후 그 시화집은 자연스럽게 내 책꽂이에 자리를 잡았다. 학부 졸업 논문 제목도 ‘황진이’의 시조 연구였던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조선의 기생은 누구나 잘 아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리 쉽게 인지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다. 기생의 삶은 다소 과장되거나 미화하는 경향이 흔하기 때문이다. 한정된 상류 기생들의 이야기로 일반화된 오해를 부르기도 한다. 참, 당황스럽다. 사회적 멸시를 받는 천민으로 기생의 삶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굴레였다. 나라에서 관리한 기생, 즉 우리나라의 관기는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에 비하여, 봉건조선의 500년만큼 오랜 기간 유지되었다. 일제 강점기 1927년에 발간된 <장한>이라는 기생 잡지에서도 “이왕 기생 노릇을 할 바에는 옛 기생을 본받자”고 강변한다. 황진이와 같은 고상한 지조를 가지고 기생의 고유한 특색을 발휘하려는 당찬 걸음이었다.

사실 우리나라 역사인물과 근대인물에서 여성의 평전은 수십 편에 불과하다. 그중에서도 돋보이는 인물은 단연 황진이다. 그녀만큼 대중의 사랑을 듬뿍 받은 인물도 흔치 않아서 소설, 연극, 영화, 드라마, 뮤지컬 등으로 널리 사랑받은 여인이었다. 허균의 ‘홍길동’과 쌍벽을 이룰 만큼 남·북한에서도 대중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은 여성은 일찍이 황진이만한 이가 없었다. 본명은 ‘진랑’이고 기명은 ‘명월’이기에, ‘개성기생 황명월’로 불러야 맞다. 문헌 기록을 검토해보면, 중종 6년(1511년)에 태어나 중종 36년(1541년) 30세의 나이에 세상을 등져 단명한 것으로 추정된다. 올해가 황진이 탄생 502주년이 되는 셈이다. 16세기 초기를 살았던 황진이는 약 300년이 지나서 19세기 화풍으로 풍속화를 그린 혜원 신윤복에 의해 회화 속의 기생 이미지로 치장한다.

황진이의 평전에 대하여 상고할 수 있는 사료는 야담집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다양한 이야기가 전하고 있지만, 진위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특히 출생에 관하여는 황진사의 서녀로 태어났다고도 하고, 맹인의 딸이었다고도 전한다. 기생 황진이는 용모가 출중하며 뛰어난 총명과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갖추어 그에 대한 일화가 많았다. 또한 미모와 가창뿐만 아니라 음률과 서예에도 정통하고 시가에도 능하였다.

황진이의 시조 작품은 일찍이 가람 이병기 선생도 ‘나의 스승은 황진이’라 일컬을 정도였다. 기생의 작품은 주로 연회석이나 풍류장에서 지어졌기에 주변 인물을 통해 회자되어 전해졌다. 문집을 남기지 못했기에 시화집, 시선집, 야담, 소총 등으로 정착된 작품들이 오늘날까지 일부 남았다. 후세에 많이 전해지지 못하고 인멸된 것이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전하는 작품은 사대부의 문집에 의해 남겨진 것으로 몇 수에 지나지 않으나 기발한 이미지와 알맞은 형식과 세련된 언어구사를 남김없이 표현하고 있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또한 1909년 기생조합에서 일제강점기의 권번 기생으로 이어지는 ‘전통예악의 기생 이미지’ 역시 오늘의 입장에서도 황진이에게는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에게 황진이의 기생 이미지는 ‘16세기에 태어나 19세기 옷으로 치장하고 21세기 언어로 의사소통하는 퓨전형 기생’이다. 근대에 들어와서도 기생에 대해서는 호감과 배척이라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함께 가져왔다. 한쪽에서 보면 기생들은 봉건적인 유물로서 배척해야 할 대상이었으나, 실상은 현대적인 대중문화의 스타였다.

기생 황진이는 아무리 다른 기생을 비추려 해도 항상 ‘황진이’만 보이는 거울과 같은 존재다. 나는 지금도 그녀만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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