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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n쉼]경쟁의 문화에서 배려의 문화로

 

1991년 처음으로 외국에 갔다. 비행기 역시 처음 타보는 것이었는데, 무모하게도 현지 상황을 전혀 모른 채 몇 년 지낼 계획으로 떠난 거였다. 요즘에야 해외여행이 옆 동네 나들이처럼 바뀌었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드문 일이었다. 오죽하면 올림픽 직전까지만 해도 당시 유일한 국제공항인 김포공항에서 고기 구워먹으며 일가친척 다 나오는 환송회 하지 말자고 캠페인을 다 했을까!

스무 시간을 날아가 프랑스 지방도시 보르도에 도착하니 모든 것이 충격이었다. 삶의 수준, 일상적 삶의 스타일, 기후와 풍토, 문화 등등…. 우리가 글로벌한 네트워크에 연결되기 전의 일이다.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깨달음이 늘 뒷머리를 때리는 나날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사소하지만 중요한 한 가지가 도로 운전에서 우측 진입 차량 우선 원칙이었다. 대륙의 도로체계를 따르는 프랑스 도로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도로 진입 시에 직진 차량은 우측 진입 차량에 양보를 해야 하는 점이 달랐다. 뻥 뚫린 길을 신나게 달리다 말고 오른쪽에서 진입하는 차량에 우선권을 양보하는 일은 쉽지 않다. 배려의 마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프랑스 운전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끼어드는 차량에 기꺼이 길을 양보한다.

우리 같으면 당장 뒤따라오는 차들이 클랙슨을 울리며 난리를 칠 것이다. 뒤의 차량에 추돌 당할 위험까지 감수해야 한다. 나는 몇 번 그런 상황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래서 그 뒤로는 나 역시 웬만하면 직진 우선의 흐름을 역행하지 않으려 한다. 어떤 면에서는 그게 더 편하기도 하다. 1960년대 중반에 태어나 이 나이에 이르도록 싸워서 이겨야하고, 경쟁에서 승리자가 되어야 한다고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 양보는 쉽지 않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면 그 양보는 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받기도 하는 것이다. 운전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길에 올라서기 위해 우측으로 진입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자신도 누구에겐가 양보를 받아야만 안전하게 도로 위에 오를 수 있는데도, 우리는 한사코 나의 앞길을 가로막는 진입 차량을 무시하며 조금이라도 빨리 가기 위해 내 우선권을 고집한다. 위험을 감수하며 매일 싸우듯 도로에 진입하면서 다른 차에게는 양보를 하지 않는 것이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그게 옳은 일일까?

1960년대 초, 20세기의 가장 큰 비극 가운데 하나일 6·25 동란을 치른,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신생 대한민국에서 군인들이 정권을 잡았다. 근대적으로 교육받고 훈련이 된 조직이라고는 군인이 전부일 때였다. 그들은 가난에서 벗어나자며 온 국민 동원 체제를 만들었다. 봉건의 구습에서 벗어나 싸우고 건설하여 선진국이 되자고 외쳤다. 산업화에 성공하자는 그들의 주장은 국민의 지지를 얻었고, 성취동기 강한 국민들의 몸을 사리지 않는 노력으로 지금에 이르렀다. 그런데 짧은 시간 압축적 성장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승자 독식의 신화 속에서 패자는 부끄러운 것이 되었다. 그러니 경쟁에서 무조건 이겨야 했고, 승리가 곧 정의가 되는 윤리적 혼돈까지 겪고 있다. 그 결과, 물질적 가난에서는 벗어났지만 정신적 빈곤은 오히려 더 깊어졌다.

지난 대선에서 산업화 세력의 후예가 승리했다. 간발의 승리였다. 48%의 국민은 경쟁만능과 승자독식의 가치관에 동의하지 않았다. 나눔과 베풂, 배려와 양보의 미덕을 요구했던 것이다. 사실 산업화 전통의 세력이 승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도 새로운 복지 프로그램을 통해 바로 그런 윤리를 내세웠던 덕이다. 경쟁에서 앞선 소수의 승자만 행복한 사회가 아니라, 경쟁에서 뒤처지는 패자를 되도록 남기지 않는 따듯한 사회, 즉 빈곤층, 고령인, 여성, 장애인, 혼혈인, 다문화가정, 성적 소수자 등 모든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여 품어 안을 수 있는 품격을 21세기 대한민국에 요구한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지난 정권이 증폭시킨 양극화의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고 국민화합을 이루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려면 먼저 타자를 배려하고, 양보함으로써 결국 내가 양보 받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그게 산업화 세력에게 주어진 과제다. 그리고 이 과제의 최적임자는 바로 박근혜 대통령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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