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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칼럼]을(乙)을 위한 나라는 있을까 없을까

 

윤창중씨가 11일 기자회견을 했다. ‘여성 가이드’의 허리를 한번 툭 쳤을 뿐이란다. 진실은 알 길 없으나, 그가 갑이고, 그 여성이 을인 건 확실하다. 청와대 대변인이면 갑 중에서도 슈퍼갑이다. 현지 채용된 여대생은 가이드가 아니라 대통령을 도운 인턴이다. 그래도 대변인 앞에서는 꼼짝없는 을의 신세다. 도망치듯 귀국한 슈퍼갑은 당당하게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의 상관 ‘울트라 슈퍼갑’에게 사죄하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으나, 인턴 을은 미국 경찰이 한국으로 가버린 피의자를 ‘공정하게’ 수사해줄 날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남양유업 ‘막말 밀어내기’의 주인공이 지난주 경찰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폭언 파일이 유포된 경위를 수사해 달라는 내용이다. 나이 많은 대리점주에게 욕설을 쏟은 점은 인정하지만, 파일이 인터넷에 유포되면서 가정이 풍비박산 났고, 시간이 지날수록 사실과 다른 방향으로 문제가 왜곡되고 있어 견디기가 힘들다고 한다. 언론 인터뷰에서 그는 일부 대리점 업주가 남양 측과의 고소·고발전에서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기 위해 일을 꾸민 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했다.

하는 일마다 타이밍을 잘 못 맞추는 딱한 이 사람도 따지고 보면 을이다. 갑 본사-을 대리점 관계에서는 갑의 일원이지만, 고용관계에서는 사용자 갑에게 꼼짝 못 하는 노동자 을에 불과하다. 그가 위협과 폭언으로라도 실적을 올리려는 건 갑의 위치에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가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대부분의 회사 조직에서는 좀 더 갑스러워지면 좀 더 빨리 승진한다는 착각을 은근히 조장한다. 하지만 천기를 한 가지 누설하자면, 절대다수의 을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진정한 갑이 되지 못한다.

예의 ‘막말 남양’은 어쩌면 회사 내에서 을로서 당하는 수모를 밖의 을에게 풀었는지도 모른다. 호가호위까지는 아니고, 남대문로 본사에서 뺨 맞고 한강에 나가 강아지 걷어찬 격이라고나 할까. 사건이 불거지면서 알려진 남양유업의 군대식 ‘영업문화’를 감안하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겠다. 맞고 자란 신병 때리는 병장 되는 법이다. ‘형님’에게 이유 없이 얻어터진 ‘똘마니’들이 밖에 나가면 더 그악스러워진다. 조폭 같은 갑을문화는 한 세기 전 지주-마름-소작인 관계를 많이 닮았다.

남양유업 사태는 ‘을의 연대’를 불러왔다. 전국유통상인회, 전국편의점업주협의회, 골목상권살리기소비자연맹 등 150여개 단체가 힘을 합쳐 남양유업 제품 불매운동에 들어가기로 했다. 갑의 횡포를 실감하는 세상의 모든 을들이 한 데 뭉치고 있다는 느낌을 줄 지경이다. 그만큼 평소 갑 때문에 흘린 눈물이 많았다는 얘기다. 왕조시대 농민봉기, 소작쟁의도 그렇게 시작되곤 했다.

처음엔 갑들이 당황하는 눈치를 보였다. 갑의 전횡이 어제오늘 문제도 아닌데 갑작스레 을들의 아우성이 터져 나온 탓이다. 남양유업이 회장의 인터넷 사과문으로 때우려다 급기야 대표이사 오프라인 사과를 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그런 당혹스러움을 보여준다. 그러나 남양유업 외에 다른 업종의 갑들은 곧 자신감을 회복한 듯하다. 법을 만드는 국회가, 공정한 규칙을 관리해야 할 정부가 여전히 자기네 갑의 편이라는 걸 새삼 깨달은 것이다. 국회는 지난주 편의점법, 공정거래법 처리 연기로 이를 확인시켜 주었다. 갑보다 더 갑스러운 을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남의 갑은 욕해도 자기 갑에게는 눈 감는 을들, ‘개 같이 을 노릇 해서’ 딴 데 가서 갑이 되고픈 을들이 여전히 많다는 점도 갑들을 안심시키는 요인일 터이다. 남양유업 불매운동만 해도 아직까지는 유의미한 효과를 거두기 시작했다고 하기 어렵다. 을들의 연대가 경제민주화, 사회적 형평 요구로 발전하기보다 감정적 분출로 그칠 기미를 보인다는 점도 갑에게 유리한 환경이다.

이번 주가 고비로 보인다. ‘윤창중 성추행’이라는 초대형 스캔들이 ‘을의 분노’, ‘을의 연대’마저 삼켜버릴 것이냐, 아니면 그 추문까지 ‘슈퍼갑질’로 한 데 묶어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인가. 그러나 어느 쪽이 됐든 대한민국이 공정한 나라라면 정부와 국회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갑들의 눈치 보느라 밍기적 거렸던 경제민주화 법안들을 한 박자 더 빠르게 추진하고, 일명 ‘남양유업법’만이 아니라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전반을 손질하는 일도 서둘러야 한다. 대한민국은 을을 위한 나라일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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