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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칼럼]泣斬馬謖<읍참마속>의 교훈

 

‘읍참마속’이란 말이 있다.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정치가이며 전략가인 제갈량이, 마속이 군령을 어기어 전투에서 패했을 때, 눈물을 흘리면서 마속의 목을 베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큰 목적을 위하여 자기가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을 버리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조조의 명령으로 위나라의 명장 사마의가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제갈량의 군사와 대치하게 되는데, 천하의 제갈량이었지만 지략이 뛰어난 사마의와 전면전을 벌일 수 없는 상황이 생겼다. 그때 마속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조조의 군대를 무찌르겠다고 자원하게 된다.

그러나 노련한 전략가인 사마의와 대결하기에는 아직 어렸고, 그래서 제갈량이 주저하자 마속은 거듭 간청하기를 “만약 패하면 저는 물론 일가권속까지 참형을 당해도 결코 원망치 않겠다”고 서약을 하고 출정을 했지만 결과는 참패당하고 말았다. 그런데 제갈량은 그 당시에는 마속에게 책임을 묻지 않다가, 갑자기 그 이듬해 마속을 처형하고야 만다. 마속의 일급 참모들은 마속 같은 유능한 장수를 잃는 것은 나라의 손실이라고 설득했으나 제갈량은 듣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미 전쟁이 끝났는데 너무 가혹한 처사라고 만류하는 데도 “아끼는 사람일수록 가차 없이 처단하여 대의를 바로 잡지 않으면 나라의 기강은 무너지는 법이다”라며 참형으로 다스렸다. 특히 자신과는 생사를 같이 하기로 문경지교를 맺은 명 참모인 마량의 동생으로, 평소 제갈량이 아끼는 장수였지만 대의를 위해서는 끝까지 책임을 져야한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고 참형을 시켰던 것이다. 마속이 형장으로 끌려갈 때 제갈량은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마룻바닥에 엎드려 대성통곡을 하였다고 한다.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단호함을 보여야 한다는 교훈이다. 한국인은 정이 많은 민족이라고 한다. 그러기에 인맥, 혈맥이 거미줄처럼 엉켜 공사(公私)가 모호하고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지금 우리사회의 혼탁함도 따지고 보면,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하여 자기가 아끼는 사람을 버리는 읍참마속이 없기 때문에 생겨나는 파행이라 할 수 있다. 자기가 아끼는 사람이라고 끌어안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버릴 것은 확실히 버려야한다. 적당히 봉합하고 가는 것은 또 다른 분열을 낳는다. 이 사회가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화합보다 먼저 읍참마속이 이루어질 때 가능하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조선시대엔 세금 비리에 관한 법도 지금보다 훨씬 엄했다. 세무비리를 저지른 관리는 사형에 처하고, 아내와 자식에게 남겨진 재산도 모두 몰수했다. 인사 청탁을 하면 일자리를 잃게 될 뿐 아니라, 곤장으로 엉덩이를 때리는 장형 100대와 멀리 유배를 보내는 유형 3천리에 처한다고 되어 있다.

성종 때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감시하던 사헌부 관리 송영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내가 인사 청탁을 하고 다닌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성종은 고민 끝에 송영의 아내에게 엉덩이를 때리는 장형 100대를 명했고, 송영 역시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해서 제살을 깎아내는 제갈량의 고뇌가 있을 때, 이 사회는 정화되고 변화가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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