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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n쉼]문화의 품격이 나라의 품격

 

이달 초 며칠 도쿄에 다녀왔다. 가까운 나라라 언제든지 갈 수 있다고 생각한 까닭에 일부러 나서질 않았더니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미운 짓을 자꾸 해서 마음이 내키지 않은 탓도 있었다. 그런데 마침 이번 학기 대학원에서 근대성에 대한 강의를 하는 중이었는데, 우리의 근대화가 서양을 직접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일본이 받아들인 서양을 따라한 것이 많아서, 근대화의 모델을 현장에서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불쑥 날아갔다.

명불허전이라 역시 도쿄는 대단한 도시였다. 지난 20여년 ‘잃어버린’ 침체의 시간을 보낸 탓에 전과 같지 않다고는 하지만, 한 시절 세계를 경영하던 제국의 수도다웠다. 롯폰기나 미드타운의 부유함은 놀라웠고, 제국호텔과 메이지 신궁의 위용은 대단했다. 돌아다니며 볼수록 부러웠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에 나서고 19세기 후반 열심히 서양을 배운 덕에, 20세기 전반에는 태평양을 두고 미국과 패권을 겨뤘던 나라, 결국 패전의 멍에를 쓰고 고난을 겪었지만, 경제발전에 국력을 집중해 1980년대에는 다시 한번 경제 패권을 놓고 세계 최강 미국을 위협했던 일본이다.

하지만 부러워할 수만은 없는 것이 엄연한 역사적 현실이 아닌가. 우리는 그 와중에 독립을 잃고 식민지가 되는 치욕을 겪었으니 말이다. 제국의 수도 도쿄의 휘황한 근대 앞에서 감탄사를 터트릴 때마다 속은 쓰리고 오기가 치솟았다. 그래 너희보다 좀 더 나은 나라를 만들 때까지 이를 악물고 노력할 것이다. 나라를 떠나면 다 애국자가 된다고, 뭐 그런 종류의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래서인지 지구상에서 일본을 우습게 알고 꺾으려는 나라가 둘이라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한국과 중국이 그 주인공이다.

한국과 중국, 일본문화의 원류

실제로 과거 역사에서 중국과 한국은 우월한 문화를 일본에 전해준 나라들이다. 근대 이전 후진국 섬나라 일본은 중국과 한국으로부터 선진 문물과 학문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열성으로 배웠고 존중했다. 다만 그 배움의 대상이 동아시아 유교문명에서 근대 서양문명으로 바뀌자 과거 문화 원류국가의 침략자로 돌변한 것이다. 그 침략의 후유증이 역사적 상처로 현존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과 한국만큼은 일본을 꺾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이미 중국은 G2 국가로서 정치와 경제의 힘에서 일본을 앞섰고, 이제 남은 것은 우리다.

그런데 도쿄를 돌아다니며 느낀 것은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실 중국이 일본을 앞설 수 있었던 것은 넓은 국토와 엄청난 인구 덕이다. 그에 반해 우리는 인구도 적고, 국토도 좁다. 과거 한때 일본이 우리에게 문화를 전수받았다 하더라도, 현재의 일본은 문화 향유의 수준과 일상적 삶의 질에서 우리보다 나으면 나았지 결코 뒤지지 않는다. 따라서 근대의 모델 일본은 쉽게 우리의 추격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문득 일본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가 떠오른다. 패전국 일본의 그늘이 채 지워지지 않은 50∼60년대 그는 세계에 새로운 영화문법을 선보이며 일본을 알렸다. ‘난’이나 ‘가케무샤’는 일본이란 콘텐츠를 세계인의 보편적 서사로 승화시킨 영화사의 걸작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무대가 일본이 아직 중국과 조선으로부터 선진문명을 전수받던 때라는 사실이다. 옷도 제대로 못 갖춰 입었을성싶은 시절임에도 그의 영화는 당대 일본의 모든 문화적 역량을 쏟아 부어 신흥 경제국가 일본의 고급한 이미지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 그에 뒤이어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 디자이너 겐조와 이세이 미야케, 애니메이션의 미야자키 하야오 같은 걸출한 스타가 줄을 이었다. 일본의 문화적 품격을 통해 그에 걸맞은 국격을 만든 것이다.

양보할 수 없는 문화의 품격

지난 주말 오래간만에 덕수궁을 지나다 궁정 근위병 교대식을 보게 되었다. 창피했다. 저러니 식민지를 당했지 하는 소리가 외국인의 입에서 절로 나올 것 같았다. 옷은 졸렬했고, 근위병들의 행동도 오합지졸의 그것이었다. 조선반도의 식민지 경영을 논했던 도쿄 제국호텔의 당당한 위용이 그 위에 겹쳐졌다. 문화적 품격마저 뒤질 것인가? 정치와 경제는 그렇다 하더라도, 문화만큼은 나아야 하는 게 아닌가? 이 질문이 아직도 나를 붙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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