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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중심은 인물이다. 역사의 주체가 인간인데다 역사를 기록한 것 역시 인간이기 때문이다. 최근 사학계가 인물사 연구에 힘쓰는 것은 다행이다.
독립운동가 류자명에 대한 인물사 연구도 그 중 하나다. 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그가 수원농림학교(오늘날의 서울대학교 농생명과학대학) 출신인 탓도 있지만 항일 독립운동을 위해 생애를 바친 애국지사이기 때문이다.
그는 1916년 수농을 졸업하고, 충주간이농업학교 교원으로 있었는데 1919년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되면서 그의 운명은 달라졌다. 류자명은 만세운동을 준비하다 왜경에 발각되자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광복 때까지 독립운동을 펼쳤다.
류자명은 사상적으로 무정부주의자였다. 도쿄대학 부교수인 모리베다쯔오(森戶辰男), 역시 일본의 무정부주의자 오스기사카에(大杉榮),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 등은 류자명으로 하여금 무정부주의자가 되겠큼 영향을 준 인물들이다.
광복 후 그는 귀국하지 않고 대만으로 건너갔다. 대만에서 농지개혁과 합작농장을 설립해 사회주의 내지는 무정부주의 사상을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 명분이고, 야심이었다.
1950년에는 중국 호남성(湖南省) 장사(長沙)에 있는 호남대학 농학원 교수로 활동하다이국 땅에서 생을 마감했다. 당시 그를 가까이서 지켜 보았던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호남성위원회 주석이었던 정성령(程星玲)은 “류자명 교수는 청년시대에 벌써 열화와 같은 애국정신을 가슴에 품고 조국 광복을 위해 강철 같은 의지로 조국을 해방하고, 사회주의 새 중국을 건설하는 위대한 혁명도상에서 수 십년을 하루 같이 간고 분투하여 탁월한 기여를 했다.” 고 회고했다. 류자명은 사후 17년 뒤에 고국에 돌아와 지금 대전 국립현충원에 잠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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