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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경 궁시장 전수교육조교

 

연무장, 성무정, 비호정…. 경기도내 활터로 유명한 곳들이다. 그 중에서도 부천 소사구 심곡본동에 위치한 성무정은 더 특별하다. 바로 중요무형문화재 47호인 궁장(弓匠:활을 만드는 기술과 그 기능을 가진 장인)의 공방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작은 공방이지만, 그곳에서는 매년 80~90장 정도의 활이 만들어진다. 현재 이 공방을 운영하는 김윤경(42) 선생은 부친의 뒤를 이어 활을 제작하는 궁시장 전수교육조교다. 10여년의 시간 동안 활과 함께했던 김 선생은 활을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주문을 받아 제작을 하기 시작하는데, 그 수가 매년 100장 내외다. 도와주는 사람 없이 홀로 활 제작을 모두 감당해 버겁지만, 활이 가지고 있는 매력 때문에 그는 손에서 활을 놓을 수가 없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장인들에 의해 제작되는 활은 습사용이다. 옛날부터 우리나라의 활은 사거리가 길고 성능이 좋아 다른 나라로부터 뛰어남을 인정받았을 정도로 우수한 무기였다. 하지만 기술이 발달하면서 무기로서의 활은 제작이 중단되었고, 지금은 심신을 수양하기 위한 습사용 활만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활은 그 모양에 따라 직궁(直弓)과 만궁(彎弓), 재료에 따라 목궁(木弓)과 향각궁(鄕角弓), 용도에 따라 예궁(禮弓)과 정량궁(正兩弓) 등 다양하게 분류되는데, 이것들은 모두 각궁을 다르게 부르는 말이다. 나무와 물소뿔, 소심줄, 민어부레 등의 재료로 만들어지는 활은 습기에 약해 여름에는 원재료 가공, 가을과 겨울에는 접착, 봄에는 건조 등 계절별로 각기 다른 과정을 거친다.

혼자 작업하기에는 힘들고 지루한 공정이지만 의외로 전통 활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 김 선생은 활 제작을 멈출 수 없다. 오늘날 활은, 무기로서의 기능을 상실하면서 그 명맥이 끊기게 되었다. 하지만 몇몇의 국가들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고, 우리나라 또한 습사용으로 명맥을 유지해 나가고 있다.

“곡선의 미를 간직하고 있는 활은 다루기가 쉽지 않은 예민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요. 또 유연하면서도 탄력이 좋아 활 쏘는 맛이 좋죠. 비록 활의 제작은 똑같은 일의 반복이라 지루하다면 지루할 수 있는 과정이지만, 활은 예술 그 자체죠.”

활에 대한 매력을 설명하던 김 선생은 “화학 약품을 사용하는 양궁은 활 쏘는 사람에게 충격을 크게 주기 때문에 충격완화장치가 필요하지만, 우리나라 활은 접착을 하는 데 있어서 민어부레풀을 이용하는 등 화학약품이 전혀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활을 쏘는 충격을 흡수한다”면서 활에 대한 장점을 이야기했다.

의성 김씨와 안동 권씨가 모여 살던 경상북도 예천은 60대 이상의 남자라면 한 번씩 활을 만들어 봤을 정도로, 예전부터 활을 많이 만들던 지역이었다. 활을 제작했던 부친 덕분인지 김 선생은 어릴 때부터 활이 만들어지는 모습을 봐왔고, 자연스럽게 부친에게서 활 제작을 배우게 됐다.

부천에서 활을 제작하던 ‘경기궁’의 명인 김장환 선생이 함께 일할 사람을 찾으면서 그의 아버지 김박영 씨가 부천에서 올라왔는데, 그때 김윤경 선생은 활 제작을 하지 않았다. 김장환 선생이 돌아가신 후 공방은 그의 아들이자 제자인 김기원 선생과 김박영 선생이 운영하게 되었고, 김기원 선생마저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부친 혼자 일을 하게 되었다. 처음 김윤경 선생은 혼자 일하기 힘든 아버지를 돕기만 했으나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제작 방법을 알게 되면서 부친과 일을 함께 하기 시작했다.

‘활’ 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을 만큼 일밖에 몰랐던 부친이 너무 고지식해, 김 선생은 늘 답답함을 느꼈다. 그는 “아버지는 인간문화재이셨던 만큼 ‘전통 활’에 있어서 최고 위치까지 올라가신 분이지만 일 외에는 본받을만한 점이 없다고 할 정도로 고지식했고 세상을 사는 요령도 없었죠. 하지만 일에 있어서 만큼은 고집도 있으셨고 엄격했어요”라며 “처음에는 이런 아버지가 답답했지만 나중에는 그런 아버지의 제작 스타일과 성격을 따라가게 되더라고요”라며 과거를 회상했다. 이런 그에게 2년 전 부친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다. 부친의 영향이 컸기도 했지만 정신적으로 의지할 사람이 없어졌다는 사실은 그를 힘들게 했다.

활과 화살의 제작기술이 전혀 달라 그것을 같이 제작할 수는 없다던 김윤경 선생은, 활을 직접 제작하기도 하지만 외부에서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강의를 하기도 한다.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에 뿌듯함과 보람을 함께 느끼기에, 그는 체험 프로그램이나 교육 프로그램을 많이 하려고 노력한다.

현재 그의 공방에는 같이 일하는 사람이 없다. 활에 대해 관심 있는 친구들은 있으나 본격적으로 일을 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예술, 음악과는 달리 활을 배우려고 하는 사람이 없어 안타깝다는 그는 자신의 대에서 명맥을 끊기게 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한다.

그는 “활 제작 기술은 다른 기술과는 달리 다른 곳에 써먹을 수도 없고 응용할 수도 없다는 한계가 있다”고 언급한다. 그렇기에 김 선생은 이러한 장인들이 자신의 일에 몰두할 수 있도록 정부가 ‘기능’과 ‘예능’이 분리된 정책을 마련하길 바란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정부의 다양한 지원을 발판으로 무용, 소리 등의 ‘예능’ 문화뿐만이 아니라, 장인들의 ‘기능’ 문화도 그 명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다음 세대에 활 제작의 명맥이 끊어질까 걱정스럽다던 그지만, 앞으로도 열심히 할 것이라는 마음가짐에는 변함이 없다. 그는 올 가을 활과 화살을 주제로 펼쳐지는 아모레퍼시픽의 ‘설화문화전’에서 전시회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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