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칼럼]달빛 편지
[경기칼럼]달빛 편지
  • 경기신문
  • 승인 2013.09.15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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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자신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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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객원논설위원 양훈도

“대추 밤을 돈사야 추석을 차렸다./ 이십 리를 걸어 열하룻장을 보러 떠나는 새벽/ 막내딸 이쁜이는 대추를 안 준다고 울었다.” 중학생 시절 배운 노천명의 <장날>이라는 시다. ‘돈사야’라는 표현이 매우 낯설었으나, “돈을 산다, 즉 대추 밤을 파는 게 아니라, 대추 밤을 주고 돈을 산다는 뜻이다”라던 선생님 설명이 퍽 재미있다고 느꼈다.

사십 년이 훌쩍 넘었어도 추석이 다가오면 이 시가 떠오르곤 한다. 이쁜이도 이젠 참 많이 늙었겠다. 주렁주렁 어린 아들딸 대추 하나 못 먹이고 새벽길 떠나야 했던 부모님들이 올핸 차례 상을 흐뭇하게 받으실까.

최근에 수필가 장영희 선생의 글 한 편을 우연히 다시 읽게 됐다. 제자에게 주는 편지글 형식인 <무릎 꿇은 나무>다. “민숙아, 어디선가 읽은 이야기인데, 사람이면 누구나 다 메고 다니는 운명자루가 있고, 그 속에는 저마다 각기 똑같은 수의 검은 돌과 흰 돌이 들어 있다더구나.”

장 선생은 제자에게 조곤조곤 설명해 준다. 검은 돌은 불운을, 흰 돌은 행운을 상징하는데,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은 자루 속에서 무작위로 돌을 꺼내는 과정과 같다고. “그래서 삶은 어떤 때는 예기치 못한 불운에 좌절하고 넘어지고, 또 어떤 때는 크든 작든 행운을 맞이하여 힘을 얻고 다시 일어서는 작은 드라마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무릎 꿇은 나무의 운명

다음 문장이 압권이다. “아마 너는 네 운명자루 속에서 검은 돌을 먼저 몇 개 꺼낸 모양이다.” 너 요즘 힘들지? 힘 내! 인생이란 그런 거야. 흔하디흔한, 어줍지 않은 위로의 말을 한 마디도 들먹이지 않고, 지치고 상처 받은 제자의 마음을 달래주는 깊은 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많은 사람이 두고두고 읽고픈 명수필로 이 글을 꼽는 이유일 게다. 장 선생이 작고한 지도 4년이 넘었다. 아주 짙은 검은 돌이 장 선생 손에 잡혔던 걸까.

장 선생은 운명자루와 검은 돌 이야기에 이어서 자연스럽게 로키산맥 해발 3천m 수목한계선에 산다는 ‘무릎 꿇은 나무’ 이야기로 넘어간다. “이 지대의 나무들은 너무나 매서운 바람 때문에 곧게 자라지 못하고 마치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있는 듯한 모습을 한 채 서 있단다. 눈보라가 얼마나 심한지 이 나무들은 생존을 위해 그야말로 무릎을 꿇고 사는 법을 배워야 했던 것이지.”

대추 밤으로 돈을 사러 이십 리 길을 걸어가야 했던 이쁜이 부모님도 무릎을 꿇고 사는 분들이었을 게 틀림없다. 이문구 선생이 그러셨던가. 우리는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고. 수목한계선 근처에서 사는 ‘우리’는 무릎을 꿇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런데 민숙아, 세계적으로 가장 공명이 잘되는 명품 바이올린은 바로 이 ‘무릎 꿇은 나무’로 만든다고 한다. 어쩌면 우리는 온갖 매서운 바람과 눈보라 속에서 나름대로 거기에 순응하는 법을 배우며 제각기 삶을 연주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인고와 순응의 미학은 값싼 운명론으로 떨어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장 선생의 <무릎 꿇은 나무>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무릎 꿇은 자세로 운명에 맞서서 마침내 명품으로 거듭나는 숭고미마저 느껴진다.

달은 누구에게나 뜬다

노천명 시인의 <장날>은 이렇게 이어진다. “절편 같은 반달이 싸리문 우에 돋고/ 건너편 성황당 사시나무 그림자가 무시무시한 저녁/ 나귀 방울에 지껄이는 소리가 고개를 넘어 가까워지면/ 이쁜이보다 삽살개가 먼저 마중을 나갔다.” 소박한 해피엔딩이다. 며칠 있으면 성황당 사시나무 무시무시한 그림자 위에도 환한 보름달이 뜰 터이다.

자신의 운명자루에서 연거푸 검은 돌을 꺼내든 이에게도, 수목한계선 어근에서 무릎 꿇은 자세로 살아가는 이에게도 대보름달은 뜬다. 돈을 살 대추 밤이 없는 이에게도, 너무 오래 걸었거나 서 있었던 이에게도 마찬가지다. 달빛은 사람을 가리지 않아서 좋다. 올 가을엔 달을 보고 무엇을 빌어 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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