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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칼럼]수원 행궁동, 2013년 10월

 

지난 토요일 밤 행궁동에서 참 벗 몇 사람과 노닐었다. 초가을 밤공기는 온화했고, 하늘엔 성근 별 가물거렸다. 수원사람의 특권이다. 수원살이 별미는 아무 때나 도심을 거닐며 정조임금님 빙의 놀이를 즐겨도 좋다는 거다.

행궁동 레지던시에서 출발한 발걸음은 시드 갤러리 카페 <다담>으로 이어졌다. <다담> 뜰에서 차 한 잔 마시는 동안 꽤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술가들의 삶에서 인문학의 정신과 인문학 도시로, 생태교통 페스티벌로 아저씨 수다가 늘어졌다.

인문학 강의가 꽤 많아졌어. 강의라는 형식이 인문학 정신과 맞나? 일단 긍정적으로 보자고. 그런데, 인문학 강의 후기가 “강의 너~~무 좋았어요” 일색이면 곤란하다는 거지?

“강의 듣고 났더니 이노무 세상 고마 확!”도 있고, “내 앞으로 공부 열심히 해서 강의한 당신과 한 번 겨뤄보겠다”도 있고, “강의 듣는 내내 마음이 불편해서 혼났다”도 있고, 뭐 그래야 제대로 된 인문학 아니겠어?

이른바 ‘시민인문학’ 중심으로 흘러가는 것도 좋아보이지는 않아. 명실상부한 인문학 도시가 되려면 더 낮은 곳에서 기반을 다져야지. 참, 생태교통 페스티벌은 잘 끝난 건가?

잠시 걷기로 했다. 예전엔 캄캄하고 괴괴했던 골목이 환하다. 말끔하게 새로 깐 돌 도로도 아직 산뜻하다. 길가 주차차량들이 애써 가꾼 화단을 가리는 게 흠이지만…. 100만 명이 다녀갔다지? 앞으로가 문제지 뭐.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어 골목잡지 <사이다>가 새로 자리 잡은 깔끔한 한옥을 구경하고 돌아서려는데 길 건너 <텃밭사람들>이 눈에 띈다. 잠시 들어가 원용덕 작가의 작품들을 둘러봤다. <똥이 좋다>. 주제도 재밌고, 삼면을 가득 채운 이런저런 인물이 똥 누는 포즈 테라코타들이 마음에 쏙 든다.

<삼국유사>에 신라 지증왕이 배필을 찾다가 거대한 똥 덩어리를 남긴 처자를 왕후로 삼았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 장면을 연상시키는 여인 모습도 있다. 더럽다거나 외설스럽다는 느낌은 전혀 없고, 중요한 삶의 행위를 해학으로 승화시킨 슬기와 솜씨만 돋보인다.

레지던시 앞까지 되돌아왔다. 레지던시엔 현재 30여명의 예술가가 입주해 있다. 그런데 말이야. 레지던시가 11월 말엔 철거된다는군. 왜? 건물도 낡았고, 근처에 미술관도 지어야 하고. 허무는 건 좋은데, 활동 중인 예술가들은 어떡하고? 대책이 없다더군. 그냥 흩어지는 수밖에.

이건 아니다. 만약 정조임금님이라도 그리 하셨을까? 예술가들이 행궁동 마을 곳곳에 들어가 정착할 수 있도록 배려하지 않았을까?

정조는 만석거와 대유둔, 축만제와 서둔을 조성하여 신도시 화성의 농업기반을 튼튼하게 닦았다. 나아가 화성의 상업에도 각별하게 신경을 썼다. ‘팔부자거리’를 조성하고, 상권을 활성화하기 위해 해남 윤씨들을 끌어오고, 인삼과 모자 독점권 특혜도 주고….

농업국가 조선에서 상공업 발전에도 힘을 쏟은 건 변화하는 시대를 앞서 헤아린 혜안이다. 행궁동 일대가 지난 한달 간 생태교통 마을 구실을 한 것 역시 시대의 가치를 헤아린 탁월한 시도다. 정조의 뜻이 헛되지 않다. 하지만 예술가 레지던시를 대책 없이 허무는 건 분명 정조의 정신에 거스르는 일이다. 생명과 문화가 21세기의 으뜸 가치라면, 방방곡곡에서 예술인들을 행궁동으로 모셔오지는 못할망정 이렇게 흩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

사실 <생태교통 수원 2013>은 지금 결산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9월 한 달의 성과가 무엇이든, 행궁동이 지속적으로 생태교통의 참뜻을 퍼트리는 진원지가 되지 못한다면 그 많은 예산 들여 치른 행사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성패는 행궁동의 미래에 달려 있다. 행궁동의 생태·문화적 가치가 지속되려면 예술가들의 힘이 더 필요하다. 그들이 마을 안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수원시가 이제라도 노력해야 한다. 자정께 집에 돌아와 누웠으나 쉬 잠이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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