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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n쉼]창조경제, 일탈의 자유와 권위적 규제 사이

 

캘리포니아 예술대학은 1961년 설립된 교육기관이다. 긴 역사를 자랑하는 서양의 대학은 물론이고, 길지 않은 우리나라 대학에 비춰도 비교적 신생 대학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짧은 역사에도 이 대학은 영화, 음악, 미술 등의 분야에서 최고를 다투는 전문 교육기관이 되었다. 그 성취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설립자의 교육철학이 큰 기여를 했다. 이 대학을 설립한 주체는 우리에게도 너무나 잘 알려진 디즈니 재단이다.

물론 이 대학의 성숙에도 우여곡절은 있다. 애니메이션의 선구자로 큰 부를 쌓은 디즈니 집안에서는 부의 사회 환원과 함께 애니메이션 분야의 지속적 인재 양성을 목표로 대학을 만들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들은 재정적 후원자로만 남고, 대학운영은 전문가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이 뜻에 따라 대학 설립의 책임을 짊어진 사람들은 우수한 교수를 확보하고자 널리 인재를 구했다. 문제는 그렇게 모인 인재들의 면면이 만만치 않았다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기 분야에서 능력은 뛰어나나 온갖 말썽꾸러기들이 다 모이게 된 것이다. 그들을 모은 설립 책임자들조차 걱정을 할 정도였다. 이런 사정은 디즈니 측에 고스란히 전해졌고,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집안 회의가 소집되었다. 그때 디즈니 집안은 격론 끝에 교육은 전문가들의 영역이며, 특히 예술은 모범생들의 영역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자신들은 절대적 후원자 이상의 간섭을 하지 않겠다며 대학 측에 전적인 자유를 준 것이다. 칼아츠(CalArts)로 알려진 캘리포니아 예술대학의 명성은 여기서 시작됐다.

그런데 여기에 흥미로운 사건이 하나 더 있다. 그 말썽꾸러기 교수들조차 기겁을 할 학생이 나타난 것이다. 영화과의 그 학생은 강의실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늘 자기 공간에 파묻혀 책만 뒤적이는 것이었다. 그 학생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두고 마침내 교수들이 회의를 갖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도 격론이 벌어졌다. 결과는 설립자들이 이 대학에 부여한 철학이 간섭 않는, 예술의 자유이니, 문제의 학생이 뭔가를 하기만 한다면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문제의 학생은 뒤에 세계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개성적인 감독이 되었다. <가위손>의 감독 팀 버튼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세계 순회 전시의 일환으로 지난해서울 시립미술관에서 드로잉 전시를 갖기까지 했는데, 그 전시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영화사의 한 장을 연 <토이 스토리>의 존 라세터 역시 팀 버튼과 같은 시기에 학교를 다닌 것으로 유명하다.

여기서 조금 길게 칼아츠의 역사와 일화를 이야기 한 것은 학교 홍보가 아니라 예술의 한 속성을 말하기 위해서다. 만일 디즈니 집안이 자신들이 전권을 쥔 신설 대학의 교수진을 보고 바꾸고자 했다면, 또 그 말썽꾸러기 교수들이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 문제 학생을 학교에서 쫓아내고자 했다면 오늘날 칼아츠의 명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예술의 자유가 일탈까지도 품어 안는 것이며, 창의성은 순응적 모범생으로부터 나오는 게 아니라는 점을 지혜롭게 인정한 것이다. 실제 인류의 역사는 말썽꾸러기들의 일탈을 통해서야 자유가 확장되며, 그 새로운 공간에서 비로소 창의성이 꽃 핀다는 점을 잘 증명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창조경제의 모델로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거론했다고 한다. 싸이는 절대 모범생이 아니다. 대마초 흡연과 군복무 문제까지 일생을 말썽꾸러기로 살았다. 그 말썽이 없었다면, <강남스타일>도 탄생할 수 없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과연 그런 말썽꾸러기들의 일탈을 허용할 수 있는가? 지난 몇 달의 정부 운영 과정을 보면 고개를 끄덕이기 어렵다. 권위주의, 엄숙주의, 도덕주의로 요약될 지금의 통치 스타일은 창조경제의 핵심이 될 예술적 자유와는 거리가 멀어도 아주 멀다. 그러면 창조경제는 구호로 그칠 것인가, 아니면 정부의 운용 스타일을 바꿀 것인가? 이제 이 질문을 던질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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