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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n쉼]모국어와 한글

 

필자의 유학시절을 가장 힘들게 했던 건 아무래도 언어 문제였다. 말이나 글로 내 뜻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해 답답했던 기분은, 출구가 보이지 않는 깜깜한 동굴 속을 헤매던 느낌으로 아직 남아있다. 한편으로는, 모국어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낀 기회가 되기도 했다.

2001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31차 유네스코 정기총회에서는 강대국 주도의 세계화로 위협받는 약소국가와 지역 문화의 고유성과 다양성을 보호하기 위해 ‘유네스코 문화다양성 선언’을 채택했다. 서문에는 문화다양성이 “자연의 생태학적 다양성만큼이나 인류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조건이며, 이를 보호하는 것은 윤리적인 책무이자 인간적인 세계화”라고 밝히고 있다. 또 본문 5조에서는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언어로, 특히 모국어로써 자신을 표현할 수 있고 창조 작업을 할 수 있으며 이를 널리 알릴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모든 이들은 그들의 문화 정체성을 존중하는 질 높은 교육과 훈육을 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이들은 자신이 선택한 문화생활에 참여하고 그들만의 문화적 관습을 행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라고 명시했다. 모국어는 문화적 권리이자 문화융성의 출발점임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마르틴 루터는 신약성서를 모국어인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종교개혁을 완성했고, 단테 역시 이탈리아어로 된 <신곡>을 저술하여 서양 근대문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서양문명을 대표하는 종교개혁과 르네상스 역시 모국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글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창제자와 창제일이 있는 언어로, 고유의 독창성과 과학적 우수성 때문에 무형문화로서의 가치가 인정돼 유네스코가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했다. 하지만, 세종대왕이라는 천재가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루아침에 뚝딱 훈민정음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문자를 새로 만들어 내놓기까지 오랜 세월, 전 세계 언어에 대한 음운학적 연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 과학적으로 완성된 문자는 문화역량의 집대성인 것이다. 당시 조선 문화의 수준과 위상을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는 세계사적이고도 충격적인 사건이다. 정작 우리 자신은 한글의 가치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지 의문이다.

서포 김만중은 자신의 수필집 ‘서포만필’에서 송강 정철의 가사 작품을 극찬하며 모국어의 가치와 정신을 강조했다. “지금 우리나라의 시와 산문은 자기 나라의 말을 버리고 남의 나라 말을 배워 쓰고 있으니, 설사 그것이 십분 근사하게는 될지라도 그것은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흉내 내는 데 지나지 않는다. 시골에서 나무하는 아이들이나 물 긷는 부녀자들이 부르는 노래가 비속하다고들 말하지만, 그 참다움을 가지고 말한다면 소위 사대부들의 시나 산문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이 삼 별곡은 본래의 자연스런 발동이 있고, 오랑캐 풍속의 속됨도 없으니, 자고로 우리나라의 참 문장은 이 세 편뿐이다. 그러나 세 편을 가지고 논한다면, 후미인곡이 가장 높고 관동별곡과 전미인곡은 그래도 한자어를 빌려서 그 빛을 꾸몄을 뿐이다”라며 당시 양반사대부들이 자기 나라의 말과 글은 천시하고 중국 글을 숭상하고 흉내 내는 허위의식에 따끔한 일침을 가했다.

지난 9일은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567년이 된 날이었다. 너무 많다고 빠졌다가 23년 만에 다시 공휴일로 부활된 날이기도 하다. 기업을 경영하는 분들을 제외하면 아마도 대부분의 국민들은 두 손 들어 환영하는 분위기다. 기업 입장에서는 노는 날이 많으면 노동 생산성이 떨어지고 비용이 증가한다는 이유로 반기지 않겠지만, 한편으로는 경제성장이 국가의 거의 유일한 목표였던 시절에 내세웠던 자본의 논리가 23년간 문화를 참 천박하게 만드는 데 기여를 한 셈이다.

문화융성을 이야기하면서 모국어와 한글의 의미와 가치는 깨닫지 못한 채, 외국어 배우기에만 열을 올리는 것은 아닌지 한글날을 지나면서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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