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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성칼럼] 첫눈 내리는 날

첫눈의 느낌은 역시 설렘이다. 또한 그리움도 섞여있다. 그러면서 기다림과 약속의 밀어(密語)인양 우리의 가슴을 들뜨게 한다. 기억 속에 보고 싶은 이들의 이름도 하얀 눈에 발자국 나듯 점점이 이어진다.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이름 하나가 시린 허공을 건너와 메마른 내 손등을 적신다”라는 시인 김용택의 ‘첫눈’을 읊조리지 않아도, 아니 몰라도 젊은이나 중년이나 갖는 감정은 비슷하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많은 사람들이 첫눈이 내리면 설레는 이유는 거기에 사랑이 녹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대표하는 말이 ‘첫눈 오는 날 만나자’다. 하늘에서 하얀 눈발이 내리는 날 만나자는 이 낭만적 약속을 한두 번쯤 안 해본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이로 인해 또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을 울리고 웃겼던지 기억이 새롭다. 첫눈이 한두 번 솜털처럼 날리다 만 게 고작이기라도 하면 수많은 연인들이 만나기로 했던 장소에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로 고심했다는 이야기는 이제 고전이다.

“사람들은 왜 첫눈이 오면/ 만나자고 약속을 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왜 첫눈이 오면/ 그렇게들 기뻐하는 것일까 … 아마 그건,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이 오기를 기다리기 때문일 것이다/ … 나도 한때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있다/ 첫눈이 오는 날 돌다방에서 만나자고/ 그러나 지금은 그런 약속을 할 사람이 없다/ 그런 약속이 없어지면서/ 나는 늙기 시작했다/ 약속은 없지만 지금도 첫눈이 오면 누구를 만나고 싶어 서성거린다/ 다시 첫눈이 오는 날/ 만날 약속을 할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시인 정호승의 ‘첫눈 오는 날 만나자’라는 시다. 첫눈과 만남을 용해한 표현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공감한다.

사랑이 동반되지 않은 그리움도 첫눈 속엔 스며있다. 수필가 피천득 선생과 김재순 전 국회의장은 첫눈이 올 때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30여 년간이나 전화 걸어 통화를 했다는 일화는 너무 유명하다. 남녀가 아니라도, 첫눈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부러운 일이다.

첫눈이 사람들에게 묘한 기대와 흥분, 설렘을 안겨주는 건 ‘첫’이라는 의미일 게다. 무슨 일이든 첫 번째는 기억에 오래 남는 법이니 말이다. 고백 못한 첫사랑이 그렇고, 처음 한 입맞춤도, 직장으로의 첫 출근도 마찬가지다. 첫눈 내리는 날은 뭔가 의미 있는 일을 만들어보려는 심리가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한 첫눈에 대한 기대와 감사는 영원할지도 모른다.

순수하고 포근한 첫눈. 노천명 시인은 첫눈을 “은빛 장옷을 길게 끌어/왼마을을 희게 덮으며/나의 신부가 이 아침에 왔습니다”며 “자- 잔들을 높이 드시오/빠알간 포도주를 내가 철철 넘게 치겠소”라고 읊었다. 기대, 그리고 와주어서 감사하다는 시적인 표현이 우리들을 감동시키며 첫눈을 한층 기다리게 만든다. 첫눈을 보고 있으면 찌든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있는 아름답고 순수했던 시절도 되살아난다. 더불어 팍팍하고 삭막해진 마음에 따스한 온기도 돌아오며 입가에 미소가 머문다.

첫눈은 예측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곧잘 인생 속 만남과 이별에 비유되기도 한다. 강릉 출신 작가 이순원은 자신의 소설 ‘첫눈’에서 “첫눈이란 게 그렇잖아. 그냥 봐선 온지도 안 온지도 잘 모르고, 그렇지만 사람 마음 들뜨게 하고, 길은 미끄럽고…”라고 표현했다. 실체를 손에 꽉 잡지 못하고 어리버리하게 지나친, 찍히지 않는 첫눈 발자국 같은 우리 삶의 모습들을 첫눈에 비유해서 정겹기까지 하다.

그러나 한기(寒氣)를 동반하는 첫눈은 겨울로의 긴 여행을 시작한다는 신호여서 마음 한켠에는 슬그머니 걱정도 자리 한다. 나이 먹은 중년에겐 특히 심하다. 어느 때부터인가 점점 설렘도 없고 낭만과 추억을 끄집어내는 것조차 귀찮아졌다는 자신을 돌아볼 때 더욱 그렇다. 또 하나의 연륜이 늘어난다는 고민이 깊어지고 ‘손톱의 봉숭아물이 첫눈이 내릴 때까지 지워지지 않으면 첫사랑이 이뤄진다’는 말을 믿었던 기억이 생각나지 않는다면 첫눈은 그저 올해의 끝자락을 향해 질주하는 계절의 바로미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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