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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성칼럼] 정치권이 기가 막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닌 나는 외갓집이 시골이었던 관계로 방학이면 그곳에서 보낼 때가 많았다. 초등학교시절 어느 겨울방학 때 일이다. 역시 외갓집에 있었던 나는 ‘귀한 새끼’ 왔다는 외할머니의 호의(?)에 힘입어 과일이니 떡이니 연일 맛나게 먹었다. 그러다 어느 날 사단이 났다. 추운날씨에 급히 먹은 음식이 체한 것이다. 배가 아프다는 호소에 외할머니는 약을 찾는 대신 배를 쓰다듬고 어루만지며 중얼거리셨다. “할미 손은 약손, 할미 손은 약손.” 하지만 차도가 없자 실과 바늘을 가지고 와서 내 엄지손가락을 묶고, 바늘로 손톱 밑을 따셨다. 급한 나머지 민간요법을 동원한 것이다. 얼마나 아팠던지, 그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누구나 한번쯤 체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갑작스레 소화가 잘 되지 않고 음식이 목에 걸린 듯한 느낌을 동반하는데 겪어본 사람이 아니면 그 증상의 고약함을 잘 모른다. 특히 명치 부위가 결리고 아플 때에는 식은땀까지 흐르며 견디기가 더욱 어렵다. 결국 약 먹고 누워야 어느 정도 참을 수 있는데 한동안 트림이나 메슥거림, 구역질이 지속되는 등 후유증에 시달리기 일쑤다. 많은 사람들이, 먹고 체한 음식을 평생 멀리하는 이유도 이러한 고통이 동반된 경험 때문이라고 한다.

체했을 때 손을 따는 것은 한의학과 깊은 관계가 있다. 체했다는 것은 서양에서는 소화불량 정도로 이야기 하지만 동양에서는 기(氣)가 막혔다고 표현한다. 다시 말해 기가 막혀 혈액순환이 되지 않아 소화기관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해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논리다. 손가락을 따서 일부러 피를 내는 이유도 기가 막힌 이러한 현상을 뚫기 위한 한 가지 방편인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 곳이나 따는 것은 아니다. 한의학에서는 혈을 찔러야 막힌 기가 뚫린다고 한다. 엄지손가락에는 ‘혈’ 중 장기와 가장 연관이 깊은 ‘소심혈’이 자리하고 있고, 이를 뚫을 때 소화기관이 원활히 활동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처방으로도 부족하면 엄지 이외의 손가락 끝에 위치한 ‘집장혈’을 따기도 한다. 체기가 심해 ‘열 손가락을 다 땄다’라는 표현은 이때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응급처치를 위한 민간요법에 불과하다.

체했다는 말을 달리 ‘얹혔다’는 표현으로도 대신한다. 이를 듣는 주위사람들은 ‘그럼 선반을 떼어놓고 먹지’라며 너스레를 떨지만 겪는 사람의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요즘 국민들의 고통이 이와 똑같다. 정치권의 소통부재로 심한 체증에 시달리고 있어서다. 동북아의 패권을 놓고 미국과 중국, 일본이 연일 대립하고 있으나 정작 그 중심에 있는 우리나라는 유유자적이다. 장·차관 등이 되지도 않는 국회일정에 발이 묶이다보니 연말 부처 현안처리는 엄두도 못 내고 있다. 그런데도 어느 누구 하나 나서 시원한 설명조차 없고, 대통령마저 적절한 대응을 위한 로드맵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법안을 책임지고 있는 국회는 더 가관이다. 정쟁에 밀려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국민들의 안위는 뒷전으로 밀린 지 오래 됐다. 국회개원 3개월이 넘었지만 법안 심사와 통과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 나라살림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예산 심의는 11년째 법정처리 시안을 넘겼다. 따라서 무엇 때문에 국회와 국회의원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이번만큼 대두된 적도 없다. 국민들은 이런 상황에 대해 실망을 넘어 심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그 심리적 타격은 ‘심하게 체한 느낌’ 그 자체다. 오죽하면 많은 국민들이 국회해산 얘기까지 하고 있겠는가.

순오지(旬五志)에 “鯨戰鰕死 言小者介於兩大而受禍(경전하사 언소자개어양대이수화)”라는 말이 있다. 다시 말해 고래싸움에 새우 죽는다는, 즉 아무 죄도 없고 상관도 없는 사람에게까지 화가 미치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지금의 정치권을 보며 새삼 떠오르는 말이다. ‘기가 막힌’ 정치권의 손톱 밑을 시원스레 찔러 혈을 뚫어줄 바늘은 어디 있는 것이지. 답답한 국민 모두가 지금 생각하는 주제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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