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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n쉼] 와인문화의 성숙, 개성·존중의 증거

 

1991년 프랑스어를 익히러 프랑스 남서부의 보르도 대학에 갔다. 읽는 것은 꽤 할 줄 알았지만, 말하는 일은 젬병이었다. 당시만 해도 내가 다닌 대학에는 회화수업이 거의 없었다. 졸업 무렵에야 외국인 교수의 강의가 두어 개 생겼지만, 민주화로 어수선할 때라 들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비록 전공이지만 이래저래 말 벙어리 수준이었다.

그런데 졸업을 한 뒤에 생각해보니, 평생 외국어문학을 한 이력이 따라다닐 텐데, 말을 못 하는 일로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돌아가신 스승의 당부도 있었다. 당신 시대에는 외국어를 못하는 게 흠이 아니지만, 내 세대에는 꼭 필요한 능력이 될 것이니, 회화를 익히라는 것이었다. 젊어 돌아가신 스승의 마지막 당부가 내내 가슴에 남았다. 그래서 떠난 유학이었다.

꼭 학위를 따야할 생각은 없었다. 일상생활 회화를 익히고 1년 뒤 돌아올 계획으로 떠났다. 그래서 선택한 대학이 보르도였다. 도시의 규모와 대학의 역사가 있으며, 한국학생이 비교적 적고, 무엇보다 생활비가 적게 드는 곳을 고르다보니, 마지막 결정이 보르도대학이었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시 외곽에 위치한 대학 주변 환경이 좋았고, 기후가 온화했으며, 일상이 평온했다. 나는 그곳에서 인간은 행복하게 살아야 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한 일상의 행복 가운데 하나로 알게 된 게 와인이다. 1990년대 초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는 와인 문화가 존재하지 않았다. 보르도가 와인의 고장이라는 것조차 잘 몰랐다. 전공이니까 어렴풋이 들은 적은 있지만, 실감이 없었던 것이다. 도착해서 보니 프랑스인들의 일상에서 와인은 물과 같은 존재였다. 식사를 하면서 선택은 언제나 와인 혹은 물이었다. 값 역시 그다지 비싸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야 모르니 비싸게 마시는 것이고, 프랑스인들은 취향에 따라 싸고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으니까.

어쨌거나 원 없이 마셨다. 대학에서도 미래의 고객을 발굴하고자 외국 유학생들을 데리고 가는 와이너리 투어가 드물지 않게 있었다. 게다가 보르도3대학에는 세계 최고의 포도주 양조학과도 있다. 나는 와인 자체보다는 돈 안 들이고 여행할 수 있는 기회라 빠지지 않고 동참했다. 나중에야 알았다. 대학을 통하지 않고 일반인 신분으로는 가보기 어려운 유명 와이너리, 즉 세계 최고의 와인 샤토들이었다는 사실을.

1990년대 말에 귀국을 했더니 우리나라에도 와인 문화가 막 번져가고 있었다. 전문적으로 배운 소믈리에도 나오고, 애호가도 늘고, 와인 전문점도 생겨났다. 그런데 가격은 비상식적으로 비쌌고, 말도 안 되는 신화가 부풀려져 따라다녔다. 일상 속에서 물처럼 마시는 소박한 행복이 아니었던 것이다. 2000년대 중반에 나온 한 대기업 산하 경제연구소 보고서에 따르면, 경영자들의 스트레스 가운데 하나가 회식 자리에서의 와인 선택이라고 할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나에게도 이따금 와인 특강 요청이 들어왔다. 난 소믈리에도 아니고, 와인 산업 종사자도 아니지만 가급적 응했다. 와인이 삶의 자연스런 한 부분이며, 행복의 한 이유가 돼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늘 프랑스인의 삶과 문화를 이야기하면서 편하게 즐기는 와인, 그러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들을 전달하려 애썼다. 그 덕분인지 좋은 평을 얻었고, 그 인연으로 귀한 분들과 사귀는 선물까지 얻었다. 그건 전문적인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즐길 수 있는 마음의 여유 같은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와인 문화가 성숙하면서 부풀려진 신화도 걷히고, 가격도 합리적인 수준으로 옮겨가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 국민들의 현명한 소비 수준과 세련된 입맛 덕분이다. 음식이 그러하듯 와인에는 정답이 없다. 자신의 취향이 있을 뿐이다. 비싼 술이 좋은 거야 당연하지만, 안 비싸도 자신의 입맛에 맞는 것을 골라서 즐길 수 있는 게 더 멋진 와인문화다. 따라서 와인문화가 성숙해진다는 것은 각 개인의 취향을 존중하는 문화가 자리 잡는다는 것이다. 집단주의로부터 개인주의로의 변환, 우리의 와인문화에는 그러한 긍정적 메시지가 들어 있다. 요즘의 커피문화 역시 같은 흐름에 있다. 각자의 취향을 찾고 존중하는 일, 내가 프랑스 유학에서 얻은 가장 즐거운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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