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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성 칼럼] 가정은 축복의 성소

 

올해도 타오르는 촛불처럼 마지막 심지를 태우고 있다. 10여년 전 꼭 이맘때 ‘대화’라는 책을 읽었다. 수필가며 영문학자인 피천득 선생과 김재순 샘터사 고문, 법정 스님, 최인호 작가의 대담 내용을 채록한 책인데, 종교, 죽음, 사랑, 가족, 행복 등 인생에서 겪을 수 있는 철학적 주제에 대해 품격 있는 대화 내용이 실려 있어 감명을 받았다. 그중엔 ‘가정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화 내용도 있다. 최인호 작가는 “가정이야말로 신이 주신 축복의 성소(聖所)다. 가정이 바로 교회요 수도원이고 사찰”이라며 “가정은 온갖 상처와 불만을 치유해 주는 곳”이라고 말하자 법정 스님은 이렇게 화답한다. “가족은 자식이건 남편이건 정말 몇 생의 인연으로 금생(今生)에 다시 만난 사이”라고.

대화 내용을 다시 음미하지 않아도 가정은 가족이 안주할 수 있는 장소를 가리키는 것뿐만 아니라 사랑과 애정을 제공하는 매우 귀중한 삶의 보금자리다. 고달프고 어려울 때 도움을 주며, 심신이 고통스럽고 힘들 때 안식을 주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잊고 살 때가 많다. 세상에 취해, 삶에 짓눌려, 먹고살기에 바빠 만사가 허망하고 주변이 꼴도 보기 싫을 때 더욱 그렇다. 때론 가족마저 귀찮아져 갖가지 핑계를 대며 폭탄주에 2차, 3차 귀가 시간을 늦추기도 한다. 가장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자식들도 머리가 커갈수록 함께 하기를 꺼린다. 어쩌다 가뭄에 콩 나 듯 함께 외식이나 여행을 할라치면 공통의 시간 찾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아내와 자식이 하는 말이 신경에 거슬려 괜한 짜증을 부리기도 한다. 그래서 가슴속에 할 말은 많지만 밖으로 내놓기도 꺼린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가족 간 진지한 대화를 언제 했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모 방송사 개그 프로그램 중 ‘대화가 필요해’라는 코너가 있었다. 무뚝뚝하고 권위적인 남편과 철없는 아내, 공부도 못하고 싸움도 못하는 아들의 밥상머리 대화를 소재로 삼은 개그다. 아빠는 아들이 언제 고등학교에 입학했는지, 엄마가 원래 곱슬머리인지 파마한 건지도 모른다. 엄마는 시댁이 어디인지 잊은 지 오래고, 아들은 아버지를 찾는 전화에 그런 사람 없다고 짜증내며 끊는 등 단절된 가족 간 대화의 일상을 담아 웃음을 선사했다. 다소 황당하고 과장됐지만 나와 내 가족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공감 때문이었는지 당시 인기가 그만이었다. 몇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가정의 사정은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우리나라 가족동반 저녁 식사율은 64%라고 한다. 저녁 식사율이란 주말 이틀을 포함, 주 4회 이상 가족과 식사를 함께하는 비율을 말하는데 40대 남성은 57%로 더 낮다.

대화가 이어지진 않지만 식탁에서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 있는 가정은 그나마 다행이다. 최근 그것마저 없이 가족 간의 대화가 단절된 ‘무언가족’이 늘고 있어서다. 가족 구성원 각자의 삶은 점점 더 개인화되고, 늘어만 가는 가계부채 속에 빨라진 은퇴까지 더해져 가장의 권위는 엉망이 돼 버렸고, ‘가족’의 해체는 이미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 지 오래다. 이런 사회상을 반영하듯 어느 정치인은 대선경선에 도전하면서 ‘저녁 있는 삶’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기도 했다.

가족이란 ‘잘 살아보자’가 아니라 ‘잘 살아가자’여야 한다.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이라면 가족 구성원 모두가 나아가는 방향을 서로 짚어줘야 하며 그 중심이 바로 가정이다.

엊그제 비가 온 뒤 날씨가 제법 겨울다워지고 있다. 거리엔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자는 자선냄비도 등장하고 따뜻한 마음을 서로 나누자는 사랑의 열매 캠페인도 한창이다. 그러나 이웃사랑보다 더 중요한 곳이 있다. 가장 가까운 곳에 베풀어야할 사랑이 메말라 있기 때문이다. 벌써 12월이 열하루나 지났다. 남은 시간 더 큰 사랑의 실천을 위해 가족에 대한 사랑부터 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더불어 올해는 가족들에게 얼마나 살갑게 대했는지, 가정을 위해 후회 없이 애정과 사랑을 베풀었는지 자성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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