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금)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정준성칼럼] 살가운 풍경이 묻어나던 목욕탕

 

음력 섣달 하순으로 접어드는 요즘, 추위가 기승이다. 대한(大寒)을 갓 지낸 계절 탓도 있지만 겨울의 정점을 과시하는 동장군의 심술이기도 하다. 해서 온도계는 지레 겁을 먹고 좀처럼 붉은 눈금을 올리지 못한다. 설이 가까웠다는 것을 알기에 충분하다. 아이들에게는 가장 설레는 날. 그래서 ‘설날’이라 부른다는 명절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이맘때쯤이면 김이 모락모락 나듯 아련한 추억이 되살아난다. 그리고 마음은 어느덧 살 냄새, 물 냄새 뜨뜻하게 뒤섞이던 시절의 읍내 목욕탕으로 들어선다.

설을 앞둔 목욕탕은 대한민국 사람들 누구나 꼭 한번은 가야 하는 곳이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60~70년대 그 시절 집에 온수가 나오지 않고 목욕탕이 없는 탓도 있었지만 깨끗한 몸으로 새해를 맞이하고 조상을 모셔야 한다는 아버지의 지론이 삼형제와 함께 네 부자(父子)의 발길을 그곳으로 향하게 하곤 했다. 집이 읍내와 떨어져 있었던 관계로 목욕 가는 날이면 아침부터 서둘렀다. 사람이 많지 않은 이른 아침 목욕탕에 가야 깨끗한 물을 사용할 수 있다며 발길을 재촉하시는 아버지 때문이다. 아버지를 따라 나서는 막내에게 어머니는 당부의 말도 잊지 않으셨다. “표 받는 아줌마가 물으면 꼭 7살이라 해야 한다. 그리고 학교 안 들어갔다고 하고 꼭~.”

목욕탕이 가까워 오면 멀리서 굴뚝으로 올라오는 하얀 연기가 먼저 시야에 들어온다. 그리고 매표소 앞에 도착하면 한가할 것이라는 예상은 늘 여지없이 빗나갔다. 이처럼 설을 앞둔 목욕탕은 언제나 만원이었다. 탕 내도 사람들이 붐벼 콩나물시루처럼 엉덩이 붙일 데가 없었다. 가운데 구멍이 뚫린 동그란 의자는 고사하고 물바가지 쟁탈전도 예사였다.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구분돼 있는 수도꼭지 확보도 보통일이 아니었다. 몸을 담가 때를 불리는 탕 속에도 사람들이 많기는 마찬가지다.

열기로 몸이 데워지질 때 쯤 되면 탕 내의 사람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내고 으레 뜰채가 등장한다. 그리고 긴 장대에 그물망이 달린 뜰채를 들고 온 관리자가 몇 차례 물 위에 떠다니는 부산물들을 건져내곤 했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일이지만. 이태리타월도 없던 그때 물기를 꼭 짠 수건을 말아 몸을 밀어주시던 아버지의 손길이 얼마나 억세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또 살갗이 벌게지도록 때를 밀어주는 덕분(?)에 온갖 인상을 써가며 눈물마저 찔끔거렸었다. 우리 삼형제를 다 씻기고 때를 밀라며 뒤돌아 앉으시는 아버지의 등은 왜 그리 넓어보였는지도 기억이 새롭다.

‘때 빼고 광내고’ 목욕탕을 나와 코끝으로 스치는 시원한 바람을 맞는 기분은 그야말로 공중에 나는 새털 그 자체였다. 그리고 자장면이라도 먹는 횡재를 더하면 상쾌함과 포만감이 어우러져 우리 삼형제를 더욱 행복감에 빠지게 했다. 목욕탕 하면 가끔씩 떠오르는 기억이다. 그리고 그 기억 속에 지금도 살가운 풍경으로 남아 있다.

그 후 목욕탕은 명절 때 연례행사로 가는 곳이 아니라 동네 사랑방이자 가족 간의 사랑을 이어가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일요일 오전이면 정작 이태리에는 없는 이태리타월을 챙겨들고 아빠는 아들과, 엄마는 딸의 손을 잡고 들러 벌거벗은 몸을 부딪치며 서로를 확인하기도 한다.

이런 그때 그 시절 추억 속 목욕탕의 온기가 사라지고 있다. 시대의 흐름이지만, 가족의 사랑이 넘치고 섞이는 정겨운 풍경이 가득했던 그곳이 아득히 먼 곳으로 자취를 감추고 있는 것이다. 아쉽다. 추억마저 사라지는 것 같아 마음 또한 허전하다.

얼마 안 있으면 설이다. 늙은 부모의 마른 몸을 밀며 찡 해하는 효자 효녀, 아들의 때를 밀어주는 아버지, 발그레한 분홍빛 볼로 요구르트를 마시며 행복해하는 아이들은 사라져 흔하지는 않겠지만, 설을 앞두고 동네 작은 목욕탕 한 곳을 찾고 싶다. 깨끗한 몸과 더불어 조금이라도 새 마음을 가지려는 속내도 있지만 과거 목욕탕의 분위기가 그리워서다. 옛것은 항상 좋은 추억으로 남기 때문일까.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