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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n쉼] 생존으로부터 자존으로

 

나는 보리밥을 먹지 않는다. 어릴 때, 하도 많이 먹었기 때문이다. 공무원이던 아버지 탓에 초중등 시절 내내 혼식에 앞장서야 했는데, 내 도시락은 학급의 거의 모든 학생들이 검사를 받기 위해 보리알을 뽑아가도 거뜬히 검사를 통과할 정도였다. 늘 반 이상은 누리끼리한 보리가 섞여 있는 도시락 트라우마 때문에 지금도 보리밥만큼은 절대 사절이다. 대신 현미와 잡곡을 섞어 먹는다. 그래서 어쩌다 식당에서 하얀 밥을 보면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풍요를 즐기게 되었을까 놀라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600년의 역사라고는 하지만 조선이 그렇게 자랑할 만한 나라는 아니었던 것 같다. 세종 대까지 이어지는 건국 초기의 활력을 제하면, 국사학자들의 허다한 ‘조선 구하기’ 노력에도 새겨볼 것은 많지 않다. 오히려 그 건국 초기의 에너지에 힘입어 간신히 600년의 역사를 버틴 것 같다.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은 외교권조차 제대로 갖지 못한 절름발이 나라였다. 영·정조 시대의 반짝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게 다였다. 세계에서 가장 낙후된 나라였던 조선은 서양 국가의 개항 요구에 대해 청나라에 물어보라고 할 정도였다.

최근 역사 드라마 <정도전>이 중장년층 남성에게 인기를 끄는 이유는 그나마 조선의 기틀을 세운 주인공이 바로 정도전이기 때문일 것이다. 경제규모 세계 10위권 국가가 되었으니 우리도 누군가 내세울만한 정치 사상가 한두 명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나? 이런 무의식의 표현이 바로 정도전에 대한 관심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요즘의 현실정치가 너무 엉망이라 그 갈증은 더더욱 강렬하다.

물론 가난과 후진성을 조선의 탓으로만 할 수는 없다. 한반도는 쓸 만한 땅이 많지 않았고, 지질의 형성 시기가 오래된 탓에 기름진 옥토도 아니었다. 자연에 의존해서 농사를 짓던 시절 이런 특성은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그 탓인지 실제로 우리 역사에는 배불리 먹은 기록이 없다. 당시의 불완전한 기록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지만, 거주 인구 대비 배를 곯을 수밖에 없는 게 우리 역사였다.

그것은 20세기 현대사 내내 마찬가지였다. 식민 통치 시절 근대 농법이 보급되기 시작하지만 일제의 침탈은 가혹했고, 해방이 되자마자 우리가 겪어야 했던 것은 분단과 전쟁이었다. 한번도 배불리 먹지 못 하고, 굶주림과 가난을 원죄처럼 짊어진 나라였던 것이다. 20세기 후반 ‘조국 근대화’의 열풍이 불었을 때도 그 핵심을 보릿고개를 굶지 않고 넘기는 것, 한마디로 따듯한 쌀밥을 먹는 일이었다. 그래서 배만 곯지 않게 해준다면, 다른 일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그런 생존의 프레임이 1970년대까지 이어졌다. 산업화가 그것의 가장 상징적 기호였다.

하지만 사람은 생존하기 위해서 사는 것만은 아니다. 다른 동물에게도 감정이 없지야 않겠으나 인간만큼 섬세한 감정을 가진 동물은 없는 것 같다. 생존은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생존의 경계를 넘어 필연적으로 자존의 프레임을 만나게 된다.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존중을 받아야 하는 것, 그게 바로 자존이다. 1970년대 후반부터 터져 나오기 시작해 1980년대 이후 우리 역사를 지배하는 한 가지가 바로 그 자존의 프레임이며, 민주화는 그 모든 자존의 압축적 표어였다.

요즘 우리 사회의 진통은 여전히 그 산업화와 민주화를 대립적 가치로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생존 없이는 자존이 불가능하지만, 자존감이 성취되지 않고서는 생존의 의미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산업화에 성공했기에 민주화를 추진할 수 있었고, 민주화가 되었기에 산업화의 열매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인데 말이다.

오늘 점심 식당에서 하얀 쌀밥을 그냥 남기는 학생들을 보며, 나는 저 축생들이 굶주림을 몰라서 저러는군 하며 생존과 산업화의 프레임에 들었었다. 하지만 점심 뒤에 들른 카페에서 과일주스와 조각 케이크를 하나 주문해서 커피와 함께 마시며 오후의 햇살을 만끽하는 내 모습을 보았다. 이게 바로 자존 프레임의 한 풍경이 아닌가? 그러니 생존과 자존은 결코 나뉘는 게 아니다. 어쨌든 나는 오늘 점심에도 보리밥은 먹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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