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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n쉼]환한 봄꽃과 대학의 어두운 그늘

 

1991년 가을 처음으로 외국에 나갔을 때 놀란 것은 선진국의 청년 실업 상황이었다. 당시 국민소득 1만 달러에 못 미치던 우리보다 몇 배 더 부자인 나라에서 청년들이 일자리가 없어 고통을 받고 있었다. 당시 내가 프랑스어 연수를 받던 보르도 대학은 법과대학의 수준이 높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우리나라의 사법연수원에 해당하는 기관도 이 도시에 있었다. 수도 파리와, 유럽의회가 있는 스트라스부르와 함께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법과대학을 갖고 있음에도 법학 석사를 마친 친구가 취업교육을 받으며 실업 수당을 타서 살아가고 있었다.

1980년대 민주화 과정을 지켜보며 대학생활을 한 나로서는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프랑스문학을 전공으로 선택한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그런데 꿈에 그리던 프랑스 대혁명의 성지에 막상 도착해보니 내가 그려왔던 풍경과는 다른 현실이 펼쳐져 있었다. 성취욕도 없었고, 미래에 대한 비전도 보이지 않았다. 이민자 문제로 인한 갈등, 세계무대에서 희미해지는 존재감, 무엇보다도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무기력한 경제와 실업률… 게다가 당시는 사회당의 미테랑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해 사회당 정부의 정치철학이 10년 넘게 이어질 때였다. 그러니 문제는 이념이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유럽은 부유했다. 산업혁명과 근대화에 앞서 성공한 그들의 부는 놀라웠고,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놀라운 문화유산, 부러운 자연환경과 관광자원, 수준 높은 시민의식… 당시 막 중진국에 들어선 나라 출신의 가난한 유학생에게 유럽은 놀라운 땅이었다. 하지만 부럽고 놀라운 것은 대부분 과거에 속해 있었다. 그들의 미래가 여전히 풍요롭고 낙관적인 것인지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쉽지 않았다. 당장 내 또래의 청년들이 일거리 없이 불안한 일상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잘 갖춰진 복지제도 덕에 굶거나 거리로 내몰리지는 않았지만, 취업 걱정을 않고 살던 우리 현실에 비추어 그다지 부럽지 않았다.

그 뒤로 20여 년, 실제 내 예상은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유럽통합이 더욱 공고해지고, 거대 시장을 만들었지만 경제는 특별히 나아지지 않았고, 실업 문제 역시 더 커지면 커졌지 줄어들지 않았다. 북유럽과 독일 정도를 제외하곤 마치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늙어가는 대륙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제야 복지제도를 축소하려 나서곤 있지만, 사회적 합의를 이루지 못한 채 분열의 골만 깊어지고 있다. 내가 이념으로서의 사회민주주의를 예전처럼 환상을 갖고 보지 않는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현실도 거기서 멀지 않다는 점이다. 높은 청년 실업률, 고임금으로 인한 경쟁력 저하, 세계 최고 속도의 고령화 사회, 과도한 민족주의 정서 탓에 미래 한국사회의 뇌관이 될 수도 있을 다문화가정 문제, 게다가 미처 갖춰지지 않은 복지 제도 등등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암울하게 만들 요소는 적지 않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전히 뜨거운 교육열과 성취욕구 정도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대학은 한국사회의 리트머스 시험지이다. 교육 생태계의 마지막 종착지이며, 청년 실업의 시발점이기 때문이다. 불행한 것은 우리의 대학이 그다지 건강하지 못 하다는 점이다. 높은 교육열 덕에 몸집만 키웠지 질적 성숙은 그에 미치지 못 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그 동안 교육은 대학이 시킨 것이 아니라 성취욕 강한 젊은이들이 알아서 스스로 해왔을 뿐이다. 하지만 문명 전환기에 빠르게 변하는 지식의 속도를 개인들에게 알아서 쫓아가라고 할 수는 없다. 대학 교육 시스템이 획기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우리가 가진 거의 유일한 자원인 고급 인적자원의 지속적 충원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봄을 맞아 대학 교정에 새로운 얼굴들이 보인다. 저 어린 청년들이 과연 몇 년 뒤 우리사회를 새롭게 뒷받침할 인적 자원으로 성장할 것인가?

재학 내내 대학은 구조조정의 몸부림을 칠 것이고, 그만큼 교육에 쏟는 에너지는 줄어들 텐데 말이다. 문득 20여 년 전 보르도 대학 교정에서 지나친 법학 석사 출신의 그 친구, 실업급여를 타고 있노라 씁쓸하게 말하던 얼굴이 떠오른다. 매화 꽃망울은 막 벌어지려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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