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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성칼럼]반복되는 삶속에 걷는다는 것은

 

‘산티아고 순례길’은 장장 800km에 이르는 길고 긴 고행길이다. 프랑스의 생 장 피드포르에서 출발해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피레네 산맥을 넘는 한 달여의 긴 여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순례객이 넘쳐난다. 힐링과 치유의 걷기 메카로도 자리하며 1천년 넘게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들을 끌어들이는 산티아고 순례길의 매력은 무엇일까?

몇 년 전 더 웨이(THE WAY)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평온한 일상을 즐기던 중년의 한 사내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찾아 나서면서 시작되는 영화다. 끝없이 이어지는 밀밭, 포도원, 저녁노을 등이 펼쳐진 아름다운 풍광 속에 저마다 가슴에 품은 사연을 내려놓고 진정한 걷기의 의미를 깨달으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게 줄거리다. 솔직히 좀 지루한 면이 없지 않았지만 끝으로 갈수록 진한 여운을 남겨 지금도 가끔 기억난다. 특히 길을 걷는 여정에 포커스를 맞춘 것이 아니라 그 길을 걷는 목적에 의미를 둔 스토리 전개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매력은 아마 이 때문이 아닐까.

영화를 보고 또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었다. 걷는다는 것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다. 당시만 해도 제주 올레길에서 시작된 걷기 열풍이 열병처럼 유행하기 시작했고, 경기도만 하더라도 각 지자체마다 경쟁적으로 둘레길을 만드는 등 힐링과 걷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됐던 때라 특히 그랬다. 해서 당시에는 여기저기 걷기도 참 많이 했는데 어느 틈엔가 시들해지고 지난 겨울엔 아예 잊어버렸었다.

봄바람이 제법 엉덩이를 들썩이게 하는 요즘 걷기가 다시 생각나는 것은 아마 계절 탓이 제일 클 것이다. 그리고 유럽 지성들이 외친 ‘걷기예찬론’도 새삼 기억이 난다. 근세 유럽 지식인들은 걷기에 대해 특별한 애정이 있었으며 이를 예찬하는 것을 특권으로 여겼다고 한다. 칸트나 루소, 괴테는 물론 윌리엄 워즈워스나 키에르 케고르 등 많은 작가와 사상가들이 이구동성으로 ‘걷고 산책하는 것’을 현란한 어구로 찬양했다. 니체는 “모든 생각은 걷는 자의 발끝에서 나온다”고 했고, 루소는 ‘우리의 첫 철학 스승은 우리의 발이다”라고 했다. 건강을 위한 운동으로든 속죄와 정화를 위한 순례로든 걷기를 통해 내면적인 변화를 겪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뜻일 게다. 하지만 이런 고전을 들먹이지 않아도 길을 걷는다는 것은 경험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좋다는 것을 잘 안다. 다만 행동이 마음을 따라 주지 못하는 아쉬움이 항상 존재하고 있어서 탈이지만 말이다.

번거로운 일상을 훌훌 털고 좀 더 호젓하게 그리고 한가로이, 발길 닿는 대로 걷고 싶은 생각 한두 번 안 해본 사람이 어디 있을까. 곳곳에 숨어 있어 이름 없는, 그러나 아기자기한 속살을 간직한 길들을 찾아 여유롭게 걷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즐겁다. 걷기를 무슨 운동처럼 죽기 살기로 한다거나 다이어트 효과까지 보겠다는 조바심으로 걷기의 의미를 훼손시키는 어리석음만 범하지 않는다면 걷기의 참맛을 더욱 진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숲길도 좋고 가로수길 거리도 좋다. 하루에 30분 이상 걸어보자. 걷다보면 머릿속이 맑아지고 텅 빈 기분이 든다. 밤에 걷는 것도 또한 매력이다. 특히 모처럼 주말에 찾아 떠난 시골의 밤길은 한밤의 자연과 벗할 수 있어 더욱 좋고 도시라는 불빛 속에서 나와 그 불빛을 바라볼 수 있어 마음마저 편안해진다. 콧등을 간지럽히는 봄바람이 함께 해주기라도 하면 행복은 더욱 커진다.

길은 사회와 문명을 잇는 통로이자, 개인의 닫힌 마음과 사람 사이의 막힌 곳을 뚫어주는 통로다. 그 길을 걷는다는 것은 삶의 은유이기도 하다. 굳이 ‘걸을 만큼 걸으면 틀림없이 어딘가에 도착할 것’이라는 철학적 의미를 부여치 않아도 인생과도 닮은꼴이다. 그래서 혹자들은 걷기야말로 생각의 지도이고, 처방전 없이 스스로를 치료하는 예방약이라고도 말한다.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자유롭고 인간적인 행위인가’라고 말한 프랑스 도보여행가 ‘베르나르 올리비에’ 말이 새삼 생각나는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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