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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암흑기 속 무너진 원형, ‘화성성역의궤’로 되찾다

경기도가 품은 평범한 진리, 세계문화유산
1-2. 수원 화성 변천사

 

19세기까지 본래 모습 지켜오다
일제강점기때부터 훼손·방치돼
6·25전쟁으로 시설물 대부분 파괴


박정희 대통령 화성 초도순시 후
1974년부터 복원사업 본격 착수
‘화성성역의궤’ 덕분에 원형 회복


1997년 세계문화유산 등재 이후
2025년까지 3단계 정비사업 진행
화성 안팎 시설물 109개 복원 예정




수원 화성은 1796년 완공 이후 19세기까지 고을 수령의 책임 아래 지속적인 수리와 보수가 이어져 원형 그대로의 모습이 유지됐었다. 1948년(현종14년) 팔달문·화홍문·북수문 등의 보수 공사를 시작으로 1875년(고종12년) 화성 행궁의 지붕을 전면 수리하는 등 수 차례의 보수를 거쳐 본래 보습을 지켜나갔다.

그러나 화성은 20세기에 접어들어 보수의 손길에서 멀어졌고 불과 2~30년 사이 급격히 무너졌다.

사건별로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수원 화성의 원형이 가장 많이 파되됐다. 당시 수원은 전선의 한복판으로 장안문의 문루 절반 이상이 폭격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6·25 이후 수원 화성에 본격적인 복원·정비사업을 벌인 시기는 1970년대다.

지난해 8월 열린 ‘수원성복원정화사업 40주년 기념 좌담회’에서 이낙천 화성연구회 회장은 “1974년 고 박정희 대통령이 수원 화성 초도순시 후 복원정화사업이 갑자기 결정됐다. 당시 사업 개시를 위한 대통령 결제 날이 8월 14일이었는데 그 다음 날인 15일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셨다. 만약 그때 결제를 못 받았다면 지금의 화성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라며 당시를 회고했다.

이 회장은 1974년 개시된 복원 사업의 공사감독을 맡았다.

수원 화성은 이후 인류 공동의 문화적 자산이 되기 위한 원형을 서서히 되찾기 시작한다.

 



수원 화성에 닥친 시련, 일제강점기·6·25

일제시대 화성행궁은 자혜의원으로 사용돼오다 정조가 머물던 봉수당을 비롯한 중심부의 건물이 철거됐고 화성부 객사는 신풍초등학교의 교사로 사용됐었다.

성곽의 여러 시설들도 무너지고 파괴됐다. 팔달문은 통행의 편리를 위해 옹성의 ‘홍예’(문의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원형이 되게 만든 문)가 해체됐고 남수문은 팔달문 일대 도심 확대로 좌·우 성벽과 함께 철거됐다.

동북공심돈은 벽체가 무너져 내부를 드러냈다. 벽돌로 축조된 대부분의 건물들의 붕괴가 심각했지만 보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화홍문의 경우 안쪽에 풀장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수원보승회가 총독부에 수 차례 팔달문 등의 수원 화성의 보수와 수리를 요구했지만 대부분 무시됐고 일제의 의도적인 훼손과 파괴로 인해 수원 화성은 본래의 모습을 잃어갔다.

1950년 일어난 6·25 전쟁은 수원 화성이 축성된 이후 가장 큰 수난을 겪게 된 사건이다. 미군의 폭격과 시가전으로 장안문과 창룡문의 문루(성문의 바깥문 위에 지은 다락집)와 성곽이 크게 파괴됐다.

일제시대 부터 방치된 동북공심돈은 완전히 무너졌다. 또 목조건물과 성곽 시설물 대부분이 훼손됐다.

 



화성이 낳은 또 하나의 유산, ‘화성성역의궤’

1960년대 까지는 전쟁 여파로 문화유적에 대한 복원을 실시할 여력과 분위기가 조성되지 못했다. 때문에 수원 화성에 대한 대규모 보수 복원이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이 민족 역사와 영웅에 대한 관심을 가졌고 문화유적 복원에 대한 정책을 만들었다. 성곽 수리는 1964년부터 부분적으로 실시해오다 1974년 정부의 국방문화유산 정비계획에 따라 5년에 걸쳐 본격적으로 착수됐다.

복원은 장안문과 창룡문 문루를 비롯해 각루 3개소, 포루 5곳, 공심돈 1개소 등이 포함됐고, 성벽의 상부인 여장(성 위에 낮게 덧쌓은 담)은 전체 성벽 5.4㎞ 중 4.5㎞를 복원해야 했다.

보수를 진행한 팔달문과 화서문의 문루 이외에 화홍문, 동장대, 서장대, 성벽 등도 대대적으로 복원과 정비가 이뤄졌다.

당시 복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화성성역의궤’였다. 수원 화성 각 건물 하나하나의 형태의 치수는 물론 공사에 소요된 못 숫자까지 명시된 ‘화성성역의궤’는 화성 축조가 종료된 후 순조1년(1801)에 제작됐다. 이 책에 수록된 뛰어난 기록 덕분에 화성은 본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화성성역의궤’은 훈민정음 해례본, 조선왕조실록 등과 함께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또 하나의 자랑스런 유산이다.

 



수원 화성의 복원과 남은 과제

수원 화성은 1970년대 대대적인 전면 공사 실시 이후 현재까지도 부분적인 정비와 보수가 진행되고 있다. 수원시는 지난 1997년 12월 수원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자 1999년부터 화성 복원 및 정비사업에 착수했다.

오는 2025년까지 3단계에 걸쳐 추진하는 이번 사업은 화성 안팎의 시설물 109개를 복원할 예정이다.

이 가운데 우선 1단계 사업(1999~2014년)으로 봉수당(정조대왕 처소), 장락당(혜경궁 홍씨 침전) 등 화성 행궁 일부와 서장대 성곽 등이 복원됐다. 남수문은 파괴된 지 90년만인 지난 2012년 복원됐다.

화성 행궁은 1970년대 복원 공사 당시 행궁터에 신풍초등학교, 도립병원, 경찰서 등 들어서 복원이 40여년간 지연됐다. 오는 2020년 완료 예정인 화성행궁 2단계복원사업은 우화관, 장춘관, 분봉상시, 별주 등 4개동 94칸을 복원할 예정이다.

우화관은 조선 정조 때 지어진 객사로 왕을 상징하는 전패가 보관돼 매달 초하루, 보름 대궐을 향해 예를 올리던 곳이며 장춘관은 도서관, 별주는 수라간, 분봉상시는 제사준비실 기능을 하던 곳이다.

이외에 1970년대 복원사업에서 제외된 성곽 중 ‘장안문~북서적대’, ‘장안문~북동적대’ 구간 등은 지난 2007년 복원됐다.

다만 남암문과 남공심돈은 아직 미복원상태다. 남수문부터 남동적대를 지나 팔달문에 이르는 구간과 팔달문 서쪽에 위치한 남서적대 역시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

 


/홍성민기자 h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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