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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n쉼]벚꽃 피고 지고

 

내 어린 시절의 봄은 개나리와 진달래로 시작되었다. 가지가 휘도록 흐드러지게 핀 노란색 개나리와 점점이 흩뿌려진 연분홍빛 진달래.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 진달래 피는 곳에 내 마음도 피어. 건너 마을 젊은 처자 꽃 따러 오거든 꽃만 말고 이 마음도 함께 따 가” 달라는 김동환의 시처럼 진달래는 겨울빛 수묵화를 선명한 빛깔로 채색한 봄의 전령사 이미지로 남아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봄꽃의 대명사가 벚꽃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우선 개나리, 진달래보다 벚꽃이 규모면에서 압도적이다. 남쪽으로부터 꽃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벚꽃이 온 세상을 뒤덮는다.

약간씩 시차는 있지만 지역마다 개화시기에 맞추어 벚꽃축제를 벌이느라 벚꽃이 피는 계절이면 온 나라가 들썩인다. 올해는 이상 고온의 영향으로 예년보다 개화시기가 조금 빨랐는데 축제를 준비하는 주최 측은 급하게 행사를 앞당기느라 곤혹을 치렀고, 일정을 맞추지 못한 축제는 낭패를 보기도 했다. 만개한 벚꽃의 장관을 놓치지 않으려 길을 나서는 사람들로 주말마다 전국의 도로는 몸살을 앓았다. 학교에서도 들뜨기는 마찬가지다. 얌전히 강의실에 앉아 수업을 하기에는 잔인한 아름다운 꽃 세상이 된다. 벚꽃 아래 둘러앉은 청춘들은 춘흥에 겨워 막걸리 잔을 기울인다. 결석하는 학생들이 평소보다 늘어날 수밖에 없다. 연인끼리 가족끼리 다정하게 벚꽃 길을 거니는 모습은 이맘때 뉴스의 단골 장면이다.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대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발길도 조심스러워지는 계절, 벚꽃 활짝 핀 봄날 풍경이다.

벚꽃이 봄날의 맏형 노릇을 하게 된 데에는 벚나무의 가로수 조성 사업이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며 국토는 급격히 황폐해졌는데, 60년대와 70년대 사진을 보면 국토의 대부분이 나무 한 그루 없는 민둥산이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야 산림복구 작업이 범국가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그 일환으로 4월5일 식목일에 단체로 나무심기에 참여한 기억도 남아 있다. 이때의 도시화, 국토개발계획에 따라 가로수도 식재되었는데 그 중에 벚나무가 많았다. 2012년 산림청 통계에 따르면 가로수 수종별 조성 현황은 벚나무(21.8%), 은행나무(17.9%), 이팝나무(6.1%) 순으로 벚나무가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이/올려 퍼질 이 거리를 둘이 걸어요/그대여 우리 이제 손 잡아요 이 거리에/마침 들려오는 사랑 노래 어떤가요.”

2012년 3월 발표된 밴드 버스커버스커의 ‘벚꽃 엔딩’이 올해도 어김없이 벚꽃 필 무렵, 각종 음원차트를 휩쓸었다. 봄날 ‘벚꽃 엔딩’의 멜로디는 크리스마스 캐럴처럼 귀에 익숙해져 입가에 맴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는가. 흥얼거리던 노랫소리도 이제는 잠잠해진다. 벚꽃이 지고 있다. 겨울을 뚫고 순식간에 펼쳐졌던 황홀한 파스텔의 연분홍 세계가 짧아서 더 꿈처럼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벚꽃이 질 때 더 아름답다. 꽃잎이 봄바람에 흩날리는 꽃비 속을 걷고 있으면 현실인지 꿈속인지 아련하다. 꽃비가 만들어준 꽃길을 걷는 것은 또 하나의 최고 호사다. 바람에 꽃물이 들며 봄날은 가고 있다. 그러나 꽃비가 날리고 꽃이 진다고 서러워할 일만은 아니다.

시인 이국헌은 이제 훌훌 털고 다시 길 떠나라고 한다. “어제 봤던 벚꽃/밤 내내 내린 비에/후드득 떨어져 버렸다/나 보기 싫다/눈물도 보이기 싫다/아침에 눈물 싹싹 훔치고/봄바람에/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기다려 달라는 소리도/눈길 주지도 못했다/봄빛은 등을 두드리며/길 떠나라 따갑게 때린다.”

그렇게도 마음을 들뜨게 하고 열병을 앓게 만든 벚꽃 천지는 지나가지만 꽃자리엔 연녹색 새순이 올라오고 있다. 자연은 허튼 공약과 구호만 내세우지 않는다. 꽃은 내년에 다시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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