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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성칼럼]끝내 밝아오지 않는 아침은 없다

 

화창하다 못해 눈부시단 말이 딱 어울리는 계절인데 마음은 칠흑이다. 국민 모두의 마음도 한치 앞이 안 보이는 검푸른 바다 속을 헤맨다. 실낱같은 희망을 갖고 귀 기울이던 뉴스도 이젠 못 보겠다. 신문 또한 펼치기가 싫다. 듣고 보아도 좌절과 절망뿐이어서다. 그러는 사이 꽃다운 생명, 눈부신 청춘은 하나둘씩 황망하게 스러져가고, 너무 화가 나고 슬프다.

바다로부터 들은 가장 큰 아픔, 가장 큰 슬픔, 가장 끔찍한 상실의 이야기를 어떻게 추슬러야 할지 모르겠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무엇으로도 위로될 수 없는 슬픔의 고통을 겪고 있을 그들 옆에서 조용히 함께 울어줄 수 있다는 것이 그저 다행이라는 단세포적 생각을 해보지만 역시 미어지는 가슴은 가눌 길이 없다. 아무것도 해 줄 수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자신마저 미워진다.

아주 오래전 일이다. 그때가 언제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초등학교 6학년 여름방학인 것만은 분명하다. 시골 외갓집에 놀러온 나는 사촌형과 함께 동네 또래들과 멱을 감으러 냇가로 간 적이 있다.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냇가는 폭이 좁고 비교적 수심이 얕아 수영을 잘하지 못하는 나였지만 벌거벗은 채 또래들과 한나절을 어울렸다. 그리고 이동한 곳이 냇가를 지나는 철로 위였다. 그곳에서 같이 온 또래들은 7∼8m가 족히 넘는 철길 위에서 제법 물웅덩이가 넓고 깊은 냇가로 뛰어내리는 묘기를 부리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엄두도 못 내고 그들을 다리 밑에서 지켜봤지만…. 그리고 잠시 잠을 잔듯한데 시끌벅적함에 깨어보니 또래 중 한명이 없어졌다고 야단이다. 뛰어내리는 것은 봤는데 물속에서 안 나왔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왕좌왕하는 사이 시간은 지나고, 마을에 알려지고, 결국 저녁 무렵 어른들에 의해 가마니에 덮여오는 애를 볼 수 있었다. 뛰어내린 후 바닥에 머리가 부딪쳐 의식을 잃고 물속에서 잠겨 있다가 하류까지 떠내려갔다는 얘기를 들은 것은 다음날 서울로 올라오고 한참 후였다. 그리고 이듬해 여름, 잃은 아들이 3대 독자였다는 것, 아들을 잃어버린 과묵한 아버지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눈물조차 마음껏 흘리지 못한 채 몇 달 동안이나 정신 줄을 놓아버렸었고, 어머니는 아들이 다닌 골목이나 학교 교정, 그때 함께 했던 친구 집, 심지어 그 애가 놀았던 냇가와 철로 위를 미친 듯이 헤집고 다니며 가슴을 쥐어짜는 슬픔을 통곡으로 토해 냈으며 그럴 때면 동네가 온통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는 슬픈 얘기도 사촌형을 통해 전해 들었다. 결국 슬픔을 극복치 못한 그 애부모는 한해를 견디지 못하고 마을을 떠났다는 얘기와 함께. 나는 한동안 당시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오그라들어 많은 고생을 했다. 지금도 흐르는 물 근처는 물론 낚시도 잘 안 가는 트라우마가 생긴 건 그때부터였다.

가족 한 사람의 죽음이 가져오는 비극과 상실의 아픔, 그리고 그를 추억하는 고통과 이별 등이 가족에게 얼마나 크게 휘몰아치는 슬픔인지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이런 슬픔의 치유는 공간과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zabeth Kubler-Ross·1926∼2004)는 인간이 죽음을 인지하게 되면 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의 단계를 거친다고 했다. 처음엔 그 사실을 부정하다가 다음엔 ‘왜? 나에게만…’ 하며 자신에게 발생한 것에 대해 분노를 폭발하고, 이어 ‘제발’ 하며 타협하고, 곧이어 깊은 우울 속에 갇혀 극도로 의기소침해지다가, 마침내 죽음을 완전히 받아들이면서 수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슬픔을 인지한 사람들에게 이런 과정을 무난히 거치도록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 않을 경우 또 다른 비극을 불러올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슬픔이 또 다른 슬픔을 치유한다는 말이 있다. 위로의 말 때문이 아니라 내 슬픔을 받아주고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해서 그렇다. 지금 우리국민이 해야 할 일은 바로 누군가가 되어주는 일이다. ‘끝내 밝아오지 않는 아침은 없고, 아침을 기다리지 못할 만큼의 긴 밤은 없다’는 희망을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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