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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n쉼]난생유곡(蘭生幽谷)

 

사람 사는 세상은 2000년 전 중국 땅이나 오늘의 한국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나 보다. 기원전 2세기 한나라 무제의 재위 시절 회남왕 유안이 편찬한 책 <회남자(淮南子)>에는 이런 글귀가 나온다.

“난생유곡 불위막복이불방(蘭生幽谷 不爲莫服而不芳)/주재강해 불위막승이불부(舟在江海 不爲莫乘而不浮)/군자행의 불위막지이지휴(君子行義 不爲莫知而止休).” ‘난초는 그윽한 골짜기에서 자라되 맡아주는 이 없다고 향기를 멈추지 않고, 배는 강과 바다에 있되 타는 이 없다고 뜨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며, 군자는 의로움을 행함에 있어 알아주는 이 없어도 그것을 멈추지 않는다.’ 군자가 마땅히 지녀야 할 본연의 자세와 사회적 책임감을 읽을 수 있다. 당시의 군자란 중국 춘추시대의 귀족에 대한 통칭이었는데, 점차 도덕수양을 갖춘 사람, 학식과 덕행이 높은 사람,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을 두루 가리키게 되었다고 한다. 그 시절에도 사회 지도층이나 기득권층에게는 이런 덕목이 부족했나 보다. 그러니 이런 글을 통해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깊은 골짜기에서 향기로운 난처럼 묵묵히 본연의 역할을 다하도록 가르침을 주려던 것은 아닌지.

꿈결처럼 눈부신 4월의 꽃 세상이 상큼한 신록으로 옷을 채 갈아입기도 전에 우리는 참혹한 지옥을 마주했다. 무책임, 악취, 협잡, 생색내기, 무능, 회피, 탐욕 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 그야말로 구린내 나는 군자들이 저지른 ‘세월호 참사’와, 그 후에 진행되는 일련의 과정이 대한민국 사회의 인정하고 싶지 않은 후진성의 진면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군자들은 남이 알아주는 일에는 앞 다투어 나서는 것도 모자라 성과 부풀리기와 이룰 수도 없는 공약 내걸기로 국민들을 현혹하는 일에 철저히 집중했다. 남이 차려 놓은 밥상에 슬쩍 숟가락 얹어 놓는 무임승차에 익숙하며 다른 사람이 흘린 피땀마저 군자들의 실적으로 둔갑시켜 화려한 갈채를 받는다. 돈이 되면 저급하고 비교육적인 오락도 훌륭한 문화산업으로 옷을 갈아입힌다. 사람이 중요한 게 아니라 1등 한 사람, 이긴 사람, 돈 많이 번 사람만 대접 받는다. 그런데 막상 문제가 발생하여 책임 소재를 따지면 군자들이 한 일은 하나도 없다. 모두 다른 사람들이 한 일이라고 강변한다. 곳곳에 만연한 문화이자 추한 맨얼굴, 우리의 현주소다. 우리 기성세대의 군자들은 좋은 말로 어린 학생들에게 바람직한 인간상과 세상에 대해 이야기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거짓말로 사기극만 연출한 셈이다. 기성세대의 일원으로 할 말이 없다. 교단에 서서 가르치는 직업이 이처럼 무기력하게 느껴진 적이 없다.

그런 면에서 보면 세월호가 침몰할 당시 목숨을 걸고 친구, 제자, 승객을 구한 5인의 희생자들은 잊어서는 안 될 의인들이자 이 시대의 진정한 군자들이다. 사고 당시 자신이 입고 있던 구명조끼를 친구에게 벗어준 정차웅 군. 침몰 마지막까지 제자들의 탈출을 돕다가 끝내 세월호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남윤철 교사와 역시 끝까지 제자들을 구조하다가 자신은 배에 남은 갓 교편을 잡은 최혜정 교사. 침몰하는 세월호 속에서 “승무원들은 마지막까지 있어야 한다. 너희 다 구하고 나도 따라 가겠다”고 걱정하는 학생에게 말한 것으로 알려진 박지영 승무원. 급박한 상황에서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수협 통장에 돈이 좀 있으니 큰아들 학비 내라. 지금 아이들 구하러 가야 한다”며 마지막 인사도 못하고 서둘러 통화를 마친 양대홍 사무장. 우리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이제 문화를 바꾸어야 한다. 화려한 조명을 사악한 군자들에게 비추는 문화를 청산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본연의 임무와 역할을 다하는 사람들에게 박수를 보내주는 문화로 옮겨가야 한다. ‘난생유곡, 깊은 산 속 골짜기의 난 꽃처럼.’ 몇 번이고 입 안에서 맴도는 문구다. 그래야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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