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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담벼락을 타고 올라 주렁주렁 열린 꽃, 능소화다. 이제부터 피고지고를 반복하며 메마른 일상을 화사하게 지켜줄 것이다. 봄비에 속절없이 지고마는 봄날 꽃 잔치와는 사뭇 다르게 능소화는 줄기차고 거센 장맛비를 견뎌 낸다. 활짝 핀 꽃 덩어리 채로 뚝뚝 떨구면서도 끊임없이 꽃망울을 터트리는 의연한 기세가 있어 꽃말이 ‘명예’인지 모르겠다. 나팔처럼 생긴 이 꽃의 영어 표기는 트럼펫 덩굴(Chinese trumpet creeper)이다. 오케스트라의 앞쪽에 앉아 멜로디를 연주하는 바이올린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하늘이라도 뚫을 것 같은 우렁찬 기운과 마음 깊은 곳의 쓸쓸함까지 아우르는 양면성을 지닌 트럼펫의 존재감은 능소화와 많이 닮았다.

문과에 장원급제한 선비의 화관으로 사용된 꽃이라 하여 어사화, 양반꽃이라고도 했다. 고택마다 어김없이 흐드러지게 핀 능소화를 보면 공부하는 선비들의 염원이 담긴 듯하다. 박경리의 ‘토지’에서도 최참판댁 능소화는 양반의 상징으로 쓰인다.

능소화는 사랑 이야기와도 잘 버무려져 있다. 소화라는 이름을 지닌 궁녀가 임금의 성은을 입어 빈이 되었지만 그 후로 두 번 다시 찾지 않은 임금을 기다리다 상사병에 걸려 어느 여름날 ‘담가에 묻혀 내일이라도 오실 임금님을 기다리겠노라’는 애절한 유언을 남기고 쓸쓸히 죽어갔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여름 날, 빈이 머물던 처소의 담벼락을 타고 주홍빛 꽃이 넝쿨을 따라 곱게 피어났다는 사랑의 전설이 전해진다.

꽃과 사랑이 버무려진 이야기는 예술의 단골 주제다. 한국에서 ‘춘희’로 알려진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는 프랑스의 소설가 알렉상드르 뒤마의 ‘동백꽃 아가씨’가 원작이다. 1848년 발표된 이 원작의 여주인공 마르그리트 고티에는 화려하게 치장하고 한 달의 25일간은 흰 동백꽃, 나머지 5일간은 빨간 동백꽃을 들고 극장이나 사교계에 나타나 귀부인처럼 생활하는 고급 창녀였다. 소설에서는 마르그리트와 양가집 아들인 아르망 뒤발과의 사랑이야기를 토대로 파리를 중심으로 한 당대의 사회상과 가치관이 서술되었고, 이 낭만적 사랑이야기가 다시 베르디에 의해 오페라로 제작, 발표되면서 지금까지도 가장 많이 공연되고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오페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안동은 지역의 이야기를 능소화의 사랑과 양반꽃 이미지를 잘 접목시켜서 문화상품으로 개발하고 있다. 조선 중기, 안동의 고성 이씨 귀래정파 문중의 며느리인 ‘원이엄마’는 1586년 31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 이응태가 세상을 뜨자 애틋하고 가슴 아린 마음을 담은 편지와 남편 병구완을 위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만들었던 미투리를 관 속에 넣었고, 원이엄마의 편지와 미투리가 1998년 택지 개발 과정에서 발견된 곳에 능소화 거리를 조성했다. 원이엄마를 소재로 한 능소화가 소설, 오페라, 노래로 제작 발표되어 새로운 사랑의 전설을 부활시키는 꽃으로 재탄생하고 있는 것이다. 능소화에 얽힌 사랑의 이야기가 신선하게 변형되고 창작되면서 우리시대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스토리텔링, 즉 이야기하기는 단순히 이야기를 구성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꿈과 감성을 보다 적극적이고 강렬하게 자극하여 공감의 폭을 넓혀주는 장점이 있다. 스토리텔링이 문화기술(CT)과 결합하면서 문학·만화·애니메이션·영화·게임·광고·디자인·홈쇼핑·테마파크·스포츠 등의 장르로 확장되고 문화산업의 핵심적인 요소로 역할을 하고 있다. 월트 디즈니는 전 세계에 산재한 이야기들을 발굴하고 상품화시켜 막대한 수익을 창출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역사 인물이나 사건을 소재로 하는 축제에서도 스토리텔링을 활용하는 사례는 쉽게 찾을 수 있다. 능소화 스토리텔링. 그 안에 담긴 아름다운 이야기가 베르디의 오페라와 디즈니의 작품처럼 더욱 활짝 피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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