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4 (수)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한때는 껌과 초콜릿을 달라며 죽어라 쫓아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자랑스러울 것 없는 과거이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그때 껌과 초콜릿은 구원과 행복의 상징이었다. 누구는 그걸 얻으려 교회에 나가기도 했고, 또 누군가는 몸을 팔기도 했다. 몸을 팔아서라도 껌과 초콜릿이 물처럼 넘쳐나는 나라를 갈 수만 있다면 좋았다. 그래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 떠나기도 했다.

어릴 적 내 고향엔 캠프 페이지라는 미군 부대가 있었다. 당연히 미군을 끼고 생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에게서 나오는 물건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것이어서, 몰래 시장에 흘러나오면 바로 유통이 되곤 했다. 불법이지만 사람들은 거기서 잼과 햄을 사고, 옷과 물품을 샀다. 정식 명칭은 따로 있었지만 그 물건이 나오는 시장을 우리 동네에서는 양키 시장이라고 불렀다. 그나마 내 유년의 1970년대만 하더라도 극빈을 벗어났을 때였다. 그런데도 양키 시장은 우리에겐 선망의 장소였다.

지나서 생각해보니 그 물질적 궁핍 때문에 악착같이 살았다. 궁핍을 벗어나고자 죽기 살기로 공부를 했고, 몸이 부서져라 일을 했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어느덧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지 않는 삶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그 시절을 체험한 사람들은 결코 유쾌하지 않은 그 시절을 기억하려 하지 않고, 체험을 하지 못한 젊은 세대들은 마치 없는 과거였다는 듯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식사나 안주로 부대찌개를 먹으면서도 우리는 그 과거로부터 자신을 단절시켰다. 물질적 충족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허기 같은 것이 있다. 스위스나 벨기에의 귀한 명품 초콜릿을 찾아 먹으며, 츄잉껌 같은 것은 길바닥의 껌딱지 만도 못하게 여기는 세상이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다른 종류의 배고픔과 추위를 겪고 있다. 서양의 저 물질적 풍요는 얼추 쫓아갔지만, 그들의 물질문명을 만든 정신적 가치를 채우지는 못한 것이다. 중세 이후 교역을 통해 물질적으로 가장 뒤진 문명을 세계 최고의 근대 문명으로 바꾼 서양인들의 윤리에 대해 우리는 무지하다.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에만 관심을 쏟은 나머지 보이지 않는 가치에는 소홀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 서양의 물질문명을 이룬 기초로서의 윤리란 무엇인가? 교역을 하며 부를 축적한 서양의 부르주아, 즉 상인계급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신뢰다.

약속이 지켜진다는 보장이 없으면 거래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성장하여 지식을 습득하고 마침내는 권력을 차지한 서양의 부르주아는 그래서 물질문명 이면에 ‘트러스트’라는 정신자본을 축적해두었다. 물론 그들도 인간인지라 제국주의와 식민 침탈 같은 악행을 저지르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장애아동을 입양하고, 여성이나 노약자 혹은 소수자를 배려하는 관용을 문화로 만들었다. 이것이 서양적 표준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자신을 과소평가할 이유는 없다. 비록 사농공상의 신분 체계 속에서 공상인 계급의 성숙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우리에게는 신뢰와 비교할 수 있는 염치 문화가 있었다.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자신을 돌아보며 스스로 부끄러워할만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는지를 살피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전통 윤리며 가치였다.

그런데 물질문명에 뒤처져 고난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염치는 사라지고 악착같은 물질적 성공만이 남은 것이다.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어린 아이를 외국에 입양 보내고, 가난한 이웃들 앞에서 자신이 가진 부를 자랑하는 저속함이 판을 치게 되었다. 그 결과가 바로 세월호와 유병언 사건이다. 얼마나 많은 몰염치가 우리 주변에 있는가! 새삼스레 염치와 신뢰의 가치가 떠오르는 뜨거운 계절이다.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