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목)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숨n쉼]섬김의 리더십이 준 감동

 

12억 가톨릭 인구의 정신적 지주인 교황이 다녀갔다. 여름의 열기가 지배하는 이 땅에서 그 며칠 동안 우리는 신선한 감동과 함께 영혼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다. 언론에서는 이를 두고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파격적 행보라는 말을 자주 썼다. 실제로 교황은 최대한 딱딱한 권위를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우리 정부에 간소한 의전을 요구했고, 낡은 가방을 손수 들었으며, 소형차를 타면서 대중과 눈높이를 맞추려 애썼다. 특히 고통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낮은 자리의 사람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세월호 희생자 유족과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 그리고 꽃동네의 장애인들이 그 대상이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면, 이건 특별한 일이 아니다.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일에 가깝다. 물론 종교 지도자로서 전임 교황처럼 좀 더 근엄한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한 사람들에게는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교황은 신의 대리자이지, 가톨릭 신앙인의 우두머리가 아니다. 말하자면, 길 잃은 양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지, 양들을 지배하는 권력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교황은 그 역할에 좀 더 충실하려 애쓴 것일 뿐이다. 그가 바쁜 일정과 경호상의 어려움에도 차량을 멈춰가며 아이들에게 입을 맞출 때,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그는 권위를 내세우려 하는 사람들을 멀리한 것으로 유명하다. 서슬 퍼런 군사독재 치하에 놓여 있던 아르헨티나에서 군부를 비판하고 시민들을 보호하려 위험을 자처한 일, 사치스런 일상을 누리거나 동성애 추문을 일으킨 사제들에 대한 엄격한 처분과 비판, 마피아와 결탁해 타락한 교황청 관리들과 운용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 개혁 등의 조치를 보고 있자면, 그가 단순히 유머 넘치는 천진한 노인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교황은 신 앞에서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것을, 사람은 존재 그 자체로 소중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분일 뿐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교황의 행보를 파격으로 받아들이는 우리 자신에게 있다. 그 문제란 사농공상의 봉건적 신분제와 해방 이후의 근대 권위주의 유산이다. 수직적 위계서열을 중시하는 이 시스템은 나이를 묻고, 직위를 묻고, 학력을 묻고, 재산을 따지는 식의 분류를 동반한다. 관계에 있어 내가 어느 높이에 있는지를 알아야만 편해지는 시스템이다. 이 패러다임 속에서 인간관계는 상호 존중이 아닌, 지배와 복종을 따른다. 그러니 교황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의장대 사열 같은 딱딱한 의전을 펼쳐야만 직성이 풀린다. 실제로 교황은 기다리는 아이들이 힘들 것을 염려하여 화동들의 꽃 전달도 없애길 바랐다고 한다. 경직된 태도의 어른들 틈에서 한참을 대기하며 긴장해 있다가, 꽃과는 어울리지 않는 표정으로 “교황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아이들을 보는 일은 그래서 안쓰러웠다.

다시 말하지만, 그에게서는 교황이라는 자리의 위세를 누리려는 권위주의적 모습을 전혀 볼 수 없었다. 노령과 시차에도 불구하고 좀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더 나아가 섬기고자 했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소외된 사람들, 사회적 약자에게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고통을 치유하려 애써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몫이다. 하지만 그 평범하다 못해 보잘 것 없는 ‘아랫사람들’에게 우리의 권력자들은 눈을 맞추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니 선거 때를 제외하곤 군림에 익숙한 권위주의자들에게 이번 교황의 행보는 불편한 충격이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 평범한 국민들에게 그것은 행복이자 축복이었다. 그는 우리 국민의 고통을 가슴에 담고, 잊지 않고 기도하겠다고 했다.

비슷한 시기에 더위에 지친 국민들을 위로해준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의 한 대사가 떠오른다. 전장에서 죽은 부하의 아들로 고아가 된 소년에게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 “너와 네 아비의 이름을 기억하마!” 힘이 없어도, 돈이 없어도, 지위가 낮아도 누군가를 소중한 존재로 기억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여름 우리가 받은 시원한 감동의 본질이 아닐까.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