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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시론]사슴을 말이라 하네

 

최근 법원 게시판에 ‘지록위마’라는 고사성어가 등장했다고 한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선거법 위반 관련 1심 재판에서 무죄 판결이 나오자, 모 부장판사가 이를 두고 ‘지록위마’의 판결이다, 법치주의가 훼손되었다는 내용의 글을 법원 게시판에 올려 논란이 되었다고 한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다’는 뜻의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고사성어는 중국 진나라의 환관 조고가 국정을 농단했던 사례에서 유래한다. 춘추전국 시대 이후 중국을 통일했던 진시황이 죽자 큰 아들을 밀어내고 어린 아들 호해를 2대 황제로 옹립하고 환관 조고가 실권을 쥐게 된다. 승상의 자리에 오른 조고가 사냥에서 사슴을 잡아다 놓고 말이라고 하자 그 위세에 눌린 신하들이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슴을 사슴이라고 하지 못하는 그 위압적인 분위기가 잘 짐작이 되지 않는다. 이처럼 누군가 말도 안 되는 것을 우기면서 억지를 부릴 경우에 ‘지록위마’라는 고사성어를 사용한다. 동물의 세계에서 사슴을 말이라고 우기는 일이 벌어진 것처럼, 식물의 세계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상사화가 아닌데 상사화라고 우기는 꽃무릇의 얘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상사화는 초록색 잎이 진 후에 초록색 꽃대가 올라와서 연분홍 또는 진노랑 꽃이 7월과 8월에 걸쳐서 핀다. 이 꽃이 진 후 다음 해 봄에 잎이 올라오니, 잎은 꽃을 보지 못하고 꽃은 잎을 보지 못한다. 마치 상사병에 걸린 것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 상사화(相思花)다.

9월 중순은 날씨가 선선하여 나들이하기에 제격이다. 요즈음 남녘의 사찰 주변에서는 붉은 색 꽃무릇이 피기 시작했다. 영광 불갑사, 함평 용천사, 고창 선운사 등 오래된 절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고창 선운사와 영광 불갑사에서는 꽃무릇이 필 시기에 맞춰서 축제를 연다. 그런데, 고창 선운사에서는 ‘꽃무릇 축제’라 부르고, 영광 불갑사에서는 ‘상사화 축제’라고 한다. 두 지방자치단체가 비슷한 시기에 같은 꽃을 두고 축제를 열면서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사실, 불갑사 ‘상사화 축제’의 꽃은 ‘상사화’가 아니라 ‘꽃무릇’인데, 왜 ‘상사화 축제’라고 부르는 일이 벌어졌을까?

물론, 둘 다 같은 수선화과에 속하는 꽃으로서, 꽃무릇 역시 화엽불상견(花葉不相見), 꽃이 잎을 보지 못하고, 잎이 꽃을 보지 못한다는 성질을 지닌 꽃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매화, 개나리, 목련 등도 꽃과 잎이 서로 보지 못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봄을 알리는 매화는 쌀쌀한 초봄에 하얀 꽃이 먼저 피고, 꽃이 진 후에 잎이 나온다. 개나리, 목련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매화, 개나리, 목련을 상사화라고 부르진 않는다.

꽃무릇을 상사화라고 잘 못 부르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꽃무릇의 전설과 관련되어 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 절에 와서 100일 기도를 올리는 젊은 처자가 탑돌이를 하는 모습에 반한 스님이 상사병에 걸려 죽었고, 그 스님의 무덤에서 붉은 꽃이 비었는데 바로 지금의 꽃무릇이라는 전설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상사화’라고 부르는 것이 훨씬 더 로맨틱하여 더 많은 관광객을 불러들일 수 있다는 자치단체의 판단이 작용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아주 오랜 옛날부터 꽃무릇이 절 주변에 많이 심어져 있었던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상사병에 걸린 스님의 낭만적인 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실용적인 이유에서였다. 꽃무릇 알뿌리엔 방부제 성분을 지닌 알카로이드가 들어 있어서, 예로부터 사찰의 금어(金魚), 즉 그림 그리는 스님들이 탱화나 단청을 그릴 때 꽃무릇 구근을 갈아서 방부제 용도로 사용했다고 한다. 최근 국보 1호인 남대문이 불에 타 다시 복원했는데 단청이 일어나고 벗겨지는 등 많은 문제가 드러나고 있다.

꽃무릇 구근을 활용하는 전통적 방식으로 좀더 시간을 갖고 복원을 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사단이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울러, 전통건축의 복원에 있어서 천천히 오래 기다려주는 여유가 우리들에게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주말에는 남도의 꽃무릇 축제를 보러가는 여유를 부려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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