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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성칼럼]늦가을 단상

 

어제 퇴근길에 수원 화성행궁앞 광장에 들어선 몽고형 텐트들을 보았다.

멀리 국화 전시회를 알리는 플래카드도 눈에 들어왔다. 올해도 어김없이 국화들의 잔치가 열리는 모양이다. 집사람과 전시회를 찾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년이 지났다니... 세월 참 빠르다는 생각도 절로 난다.

조선시대 문인 서거정(徐居正)의 菊花不開 然有作(국화불개 창연유작)이란 한시(漢詩)가 불현듯 떠오른다. 佳菊今年開較遲(가국금년개교지 아름다운 국화가 금년에는 비교적 늦게 피어)/一秋情興 東籬(일추정흥만동리 가을의 정과 흥이 동쪽 울타리에 게으르도다)/西風大是無情思(서풍대시무정사 가을바람은 참으로 무정도 하지) /不入黃花入 絲(불입황화입빈사 국화에 들지 않고 귀밑머리에 들었구나).

올해는 국화꽃이 예년과 비교해 늦게 피어 가을의 흥취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가을바람은 무정하게도 국화에 들어서 꽃을 피우지 않고 귀밑머리에 들어와 늙음을 재촉하고 있다는 시 구절처럼 인생까지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 계절인가 보다.

가을의 주된 정서는, 서리를 맞아가며 피는 국화에서 오상고절(傲霜孤節)을 보는 것을 비롯 단풍의 풍경에서 나타나는 조화롭고 아름다운 빛깔의 이미지들로부터 이어진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름다움보다는 비애감을 조장하는 이미지가 될 때가 많다. 기러기나 귀뚜라미의 경우는 날아가는 모습이나 우는 소리가 고독과 비애를 드러내는 것처럼 떨어지는 단풍은 처량한 분위기 그 자체여서 더욱 그렇다.

이런 가을을 공감하는 것은 여자보다 남자들이 더하다. 그래서 가을을 남자의 계절이라 부르는지 모르지만 주변을 돌아보아도 가만 있지 못하는 남자들이 많다. 이들은 ‘쓸쓸하다’ ‘외롭다’ ‘낙엽을 밟으며 시를 생각한다’ 등등 소위 ‘가을 타는’ 얘기도 자주 한다. 술먹을 핑계(?)를 대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인생의 추락에 대해 반응하는 민감함의 결과들이다. 또 삶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소위 ‘반추’의 시간을 갖는 것이기도 하고.

요즘 산이고 들이 요일에 관계없이 매우 붐빈다. 그리고 거기에는 남자들이 눈에 많이 뛴다, 그중에도 연륜이 묻어나는 중년이상이 유독 많은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지난 주말 집사람이 친구 들과 남이섬을 다녀와서도 이런 말을 했다. ‘웬 사람들이 그리 많은지.. 그중에서도 남자들이 많은 것에 놀랐다. 모두다 시인이자 철학자로 착각할 정도로 분위기가 무거워 두 번 놀랐다’ 며 나도 그러냐고 물었다.

사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단풍뿐인 요즘 ‘센티멘탈’해지지 않는 남자가 있다면 거짓일 것이다. 매년 겪는 일이면서도 매번 새롭게 다가오는 계절병이기도 하지만 살아온 나날이 앞으로 남은 날보다 많은 사람들이면 쉽게 그 병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베이비 부머 세대 공무원’들은 더할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인생을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생각한다. 또 사회의 관습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세월이 가면 그것에 대한 책임이 더욱 커진다.

어렵사리 취직을 하고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그 생활이 청운의 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거나 인간성이 없는 상사를 만나서 괴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므로 ‘현실이 더러워도 참고 지내야 할까’ 아니면 ‘사표를 집어던지고 가난하더라도 마음 편한 삶을 살아야 할까’를 고민하다 결국 세월을 놓치고 정년을 맞이한게 그들이다. 따라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동안 맞춰 왔던 시간표도 다시 짜야 한다. 그러나 남는 것이라곤 쥐꼬리 만한 연금이 전부이고 그나마 깎일 처지 이니 가을을 느끼는 정서가 남다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옛날 선비들은 자의든 타의든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돌아가자, 전원에 잡초가 우거지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로 시작되는 ‘귀거래사’를 여유 있게 읊었다고 한다. 그것조차 없는 요즘의 우리들. 가을비 젖는 낙엽처럼 처량하기 이를데 없다. 진한 국화 향은 한국인이 가장 즐기는 꽃향기이다. 사방에 국화향기가 지천인데 마음은 공허한 것도 이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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