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금)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정준성 칼럼]여름의 끝자락, 가을의 길목에서

 

얼마 전, 우연히 아파트 창문을 통해 주변에 널어놓은 붉은 빛의 고추를 보았다. ‘아니 벌써’ 하면서도 유난히도 더웠던 여름의 끝자락이라 반가움이 앞섰다. ‘땡볕에 말리는 고추가 등장한 걸 보니 가을도 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잠시 어릴 적 추억이 떠올랐다.

시골집 마당 한켠엔 제법 넓은 평상이 있었다. 여름밤이면 식구들이 올라 앉아 더위를 식히던 곳이다. 저녁을 먹기도 하고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던 평상 옆엔 가끔 멍석이 깔린다. 이웃에 사는 외삼촌 식구들이 마실 올 때다. 그리고 어른들 차지가 되어 버리는 평상을 피해 아이들은 멍석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곳에 모여 앉아거나 누워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고 우물에 담가 두었던 참외와 포도 등 과일을 가져다 먹으며 그렇게 한여름 밤을 보내곤 했다.

밤이면 꿈과 낭만이 넘쳤던 평상과 멍석엔 다음날 으레 붉은 고추가 널린다. 밭에서 따온 물고추가 마른고추로 변신하기 위해 일광욕(?)을 하는 것이다. 고추를 널어놓은 것을 볼 때마다 ‘저녁엔 평상에 가지 않으리라’ 마음속으로 다짐하지만 번번이 실패다. 텔레비전도 소일거리도 없던 시절이라 식구들이 모여 앉기 시작하면 낮의 결심은 어느덧 잊어버린다. 이슬을 피해 고추를 걷어낸 평상과 멍석에선 매캐한 고추 냄새가 났지만 생각보다 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우물에 담가놓은 과일들의 유혹에 결심이 무너지는 것이다.

그렇게 며칠을 지나면 하늘은 더욱 높아지고 구름도 하얀 뭉개 꽃을 피운다. 낮게 떠다니는 고추잠자리들도 숫자가 늘어나고 낮이면 매미소리, 밤이면 풀벌레 소리가 더욱 강하고 선명하게 들린다. ‘여름의 끝물’을 알리는 신호들이다.

새벽녘 창 너머로 스며드는 기운이 제법 선선한 것도 변한 게 없다. 계절은 어김없이 온다고 누가 이야기했는지 하나도 틀리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새벽만 그런 것이 아니다. 아직 한낮 더위가 기승을 부리지만 어느새 아침저녁으론 시원한 바람도 분다. 에어컨을 틀지 않고 여름내 열어 놓았던 창문들도 자주 닫는다. 어릴 때 평상에서 접하던 후덥지근한 한여름 밤의 바람과는 확연히 차이가 있다고 느끼면서….

에어컨과 선풍기를 안 틀고는 못 살 것 같은 한여름에서 해가 지면 슬며시 문을 닫는 요즘, 여름도 가을도 아닌 이런 시기까지 불과 열흘의 시간이 흘렀다. 단 며칠 사이에 이렇게 계절의 변화가 감지된다. 정말 간사한 것이 바람 몇 점에 금방 변해버리는 사람의 마음이란 것을 실감한다.

기온에 민감한 집사람은 엊그제, 삼베 홑이불을 개어 들여놓고 두툼한 이불을 내놓아야 할 것 같다며 가는 세월이 무섭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은 견딜 만하다. 이불을 완전히 덮는 것도 아니고 걷어차고 안 덮는 것도 아닌, 잠도 더위 때문에 깨는 일이 없어서다. 오히려 이불자락을 둘둘 말아 다리 사이에 끼워 넣고 잠자는 덕분에(?) 가끔 다리와 팔에 접힌 이불자국이 나는 게 흠이지만 아침의 컨디션은 한여름과 비교가 되질 않는다.

출퇴근길 아파트 어귀나 공원에서 보는 감나무와 대추나무엔 제 색깔을 내는 열매들로 풍성하다. 나무 밑, 혹은 화단의 꽃들도 여름을 견뎌낸 훈장들이 주렁주렁 하다. 씨앗들이 내년을 기약하고 있어서다. 이런 여름 꽃들을 보면 어릴 적 시골의 담벼락이나 울안, 사립문 부근에 많이 피는 맨드라미도 생각난다. 한여름 더위에 맨드라미처럼 버티는 꽃들도 아마 드물 것이다. 꽃대의 반이나 차지하는 닭 벼슬처럼 생긴 새빨간 꽃을 이고 여름을 견디니 그 힘이 얼마나 부치겠나 하며 많이 불쌍해했다. 그리고 여름의 끝자락 가을의 문턱에서 계절을 알리는 꽃 맨드라미가 아름답다기보다는 조금은 징그럽다고도 느꼈다. 하지만 나중에 간신들의 반란을 평정한 충성스런 장군이 흘린 피가 꽃이 됐다는 전설을 알고 나서 은연중 좋아하는 꽃으로 염두에 둔 기억도 새롭다. 그러나 봉숭아와 함께 여름 꽃의 대명사인 맨드라미 보기가 매우 힘들어 안타깝다.

곧 들국화의 계절이 올 것이다, 아니 벌써 왔는지도 모른다. 가을이 오는 길목, 우리네 산야에 아무렇게나 피어있는 꽃이 들국화다. 그러나 정작 들국화라는 이름의 꽃은 없다. 들에 핀 국화가 들국화인데 그중에서도 구절초가 이맘때면 우릴 가장 많이 반긴다. 그래서 삶에 취해 사는 우리네는 구절초를 보며 가을이 왔음을 느끼기도 한다. 요즘이 꼭 그렇다.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