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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성 칼럼]‘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기자 초년병 시절, 가을만 되면 숱하게 부르고 들은 노래 중 하나가 ‘잊혀진 계절’이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우 우우우” 읊조리듯 시작하는 멜로디가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잊혀진 계절은 지금도 10월만 되면 애창곡 1위 반열에 오른다. 특정 계절을 노래한 대중가요 하나가 이토록 생명력이 긴 것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노랫말 속에 녹아있는 서정적인 분위기가 듣는 이들에게 추억을 하나쯤 생각나게 해서 그럴까. 아니면 모든 이별에는 메아리치는 변명이 있지만 무표정으로 헤어진 뒤, 그때 미처 못 했던 말을 이후 내내 곱씹는 절절한 심경을 공감해서 그럴까. 아무튼 깊어가는 가을만 되면 수많은 사람들의 애창곡으로 남아 쓸쓸함과 위안을 전하고 있다.

며칠 지나면 10월도 마지막 밤을 맞는다. 그 밤이 지나고 나면 낙엽이 더욱 스산하게 흩날리는 시기에 접어들고 덩달아 시간의 허허로움을 탓하는 사람들도 늘어날 것이다. 가을에 유난히 울렁증이 심한 나는 벌써부터 계절의 변화에 민감히 반응하고 있지만 달력 한 장을 넘기며 더 심해질 것 같다. 한두 해 겪은 일도 아니어서 ‘그러려니’ 내심 위안도 삼아 보지만 심난한 맘이 가시질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다. 11월이 낙엽 지고 찬바람 부는 겨울 문턱이라 생각하면 더하다.

누가 그랬듯 ‘가을이기에 그렇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가을에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뭘까. 그리고 뭔가 축 가라앉는 느낌은 또 무엇인가. 내면을 향한 손짓에 울림이 없다면 영락없는 우울 증세다. 많은 사람들이 가을은 풍성함 속에서 빈곤을 인지하는 센티멘털의 계절이라 이야기한다. 자아에 대한 내밀한 감각을 강하고 섬세하게 일깨워 주는 것이 분명해서다.

가을이 사람을 그리워하게 하는 것도 생각이 많이 들게 하는 이유 중 하나다. 인간관계에 대한 여러 감흥이 필연적으로 일어나면 생각은 과거로의 여행을 진하게 하게 마련이어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가을에 생각을 많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 자신과 깊은 곳에서의 대화가 부단히 이루어져서다. 자기만 아는 내면의 깊숙한 또 다른 나와 만나 지나옴을 반추하고 앞으로의 남은 나날을 이야기 할 때 어느 누구고 생각이 많아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가을을 인생에 비유하자면 아마도 중년기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약해지는 가을볕이 몸의 변화를 가져왔다는 이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같은 변화는 자연의 이치에 따른 자연스러운 순항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지나온 과거에 대한 아쉬움과 남은 날에 대한 염려가 더해져 만들어낸 현상이다.

사람은 누구나 주위의 부러움을 사는 사람이고 싶지만 생각대로 안 된다. 간혹 뜻한 바대로 기쁨도 만나고 삶의 희열도 느끼지만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가 많다. 특히 물질과 인연은 더하다. 사는 동안 화를 내고 좌절하고 슬퍼하며 분노하는 이유도 모두 여기서 비롯된다. ‘사는 게 그런 것 아닌가’ 하며 세상에 순응하려 해보지만 그것도 쉽지 않다. 가을에 세월 지나는 소리를 들으면 더하다.

가을이 주는 울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심과 차별 없이 자기를 보듬고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게 그것이다. 생각은 공허하고 심난하지만 몸 안에 나직이 웅크리고 있는 이 같은 ‘힘’을 발견하면 텅 빈 가슴마저 꽉 찬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죽어야만 헤어질 영육 간 동반자로의 깨달음도 얻게 되며 복잡한 세상 인간관계에서 오는 미움과 질투, 이 모든 게 부질없다는 생각도 더불어 하게 된다. 가을 낙엽처럼 메마른 가슴을 적셔주는 매혹적 울림이다. 가을날 떨어지는 낙엽에서 얻는 것도 있다. 타고난 지성과 지혜도 시간이란 무게에 치이면 휴지처럼 나뒹굴고, 쌓아놓은 명예와 부귀도 가는 세월의 빈 뜨락 앞에선 쭉정이가 된다는 사실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비록 가을이지만 세상의 복잡한 일, 그리고 인간관계에서 오는 질투와 미움이 다 한밤의 꿈처럼 펼쳐진다. 이럴 땐 그저 가을의 풍취에 푹 빠져 친구에게 전화를 걸면 어떨까. 꿈과 희망, 쓸쓸하지만 내일을 기약하려 했던 노랫말이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잊혀진 계절을 들으며 말이다. 찬란했던 각자의 청춘이 회상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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