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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성칼럼]미워도 다시 한 번

 

무더운 여름이 가고 선선한 가을이 오나 싶더니, 아침저녁으로 한기가 느껴지는 가을의 막바지다. 이맘때쯤이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추억이 떠오른다. 까까머리 고교 시절 미성년자 입장 불가 딱지가 붙었던 ‘미워도 다시 한 번’이라는 영화를 몰래 보다 지도 선생에게 적발돼 곤혹을 치른 일이다.

지금이야 실버극장 이외에 동시 상영이 없지만 당시엔 서울 변두리 극장은 어디나 ‘조조할인’에 동시상영을 했다. 상영되는 영화는 으레 국산영화와 외화가 각각 한 편씩이었다. 신촌에 있는 신영극장도 그랬다. 그날은 배짱 좋게(?) 학교까지 조퇴하고 극장을 찾았다. 그리고 사실 ‘미워도 다시 한 번’을 보러 간 것은 아니었다. 동시에 상영한 사춘기 호기심을 자극하는 외국 영화가 목표였다. 지금으로 치면 야한 영화 축에도 못 끼는 그런 삼류 영화다. 그런데 보기 좋게 단속에 걸린 것이다. 학교에 통보되고, 돌아온 여파는 꽤나 컸다. 담임선생은 교무실 앞에서 벌을 서는 나의 머리를 연신 출석부로 내리치며 ‘쯧쯧’ 대셨고, 생활지도 선생은 ‘정학’ 운운하며 부모를 모시고 와야 한다고 야단을 쳤다. 시골서 유학(?)온 나로선 부모 모시고 온다는 것이 보통 사건이 아니었다. 다행히 담임선생의 배려로 반성문 백장으로 정학을 면했지만 내용에 적은 영화 제목은 두고두고 잊히질 않는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 중견기자 시절, 별로 유쾌하지 않은 추억의 멜로 영화 제목이 정치판에 등장한 것을 보았다. 지역색이 첨예하게 갈렸던 80∼90년대 선거 때만 되면 어김없이 나타난 정치인들이 ‘미워도 다시 한 번’을 외치며 눈물표를 구걸하고 나선 것이 그것이다. 치적이 없고 지역발전에 기여하지 않았으며 전과가 있거나 허물이 있어도 이 구호만 외치면 일부 지역에서는 성공도 거두었다. 그래서 지금도 특정 지역에서는 선거 때만 되면 이 구호가 난무한다. 따라서 이런 말도 생겨났다. ‘우리가 남이가’ ‘미워도 다시 한 번 이제잉’.

그렇다면 미워도 다시 한 번은 정치판에만 있는 것인가. 우리의 삶속에서도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아는 지인이 20여 일 전 이런 얘기를 했다. 부모 자식 간엔 미워도 어쩔 수 없는 것이 몇 가지가 있는 것 같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말도 그중 하나 아닌가 생각한다고. 그러면서 하소연을 이어갔다. 경제적으로 비교적 넉넉한 지인은 아들 둘이 있는데 그중 둘째가 취직엔 뜻이 없고 서른이 넘도록 백수로 지내고 있던 중 장사를 해보겠다고 나서 처음엔 ‘그래 그거라도 해서 먹고 살라’는 심정으로 자금 지원을 해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두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지원을 해주었지만 번번이 들어먹기 일쑤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핸드폰 가게를 한다며 다시 손을 벌리고 있어 고민이라며 속이 터진다고 했다. 그러면서 ‘미워도 다시 한 번’을 생각도 해봤지만 영 아니다 싶어 괴롭다고도 했다. 그런 지인으로부터 엊그제 아들이 개업한다는 전화를 받았다. 통화를 끝내며 지인의 이런 말이 생각났다. 자식이기는 부모가 없다?

‘너도 자식 나아 길러봐라’. 철없이 굴며 부모 속을 썩일 때 어른들에게 자주 듣던 말이다. 특히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사고 칠 때 꾸지람으로 많이 들었다. 자식을 출가시키고 출가한 자식이 손자를 낳은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속이 상했으면 저런 말을 했을까 짐작이 가지만 당시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말들이다.

요즘 모임에 가면 앞서 말한 지인의 고민 이외에 자식과 관련된 다양한 고민거리가 화제의 중심이 될 때가 많다. 취직 못해 빈둥대는 자식과의 기 싸움을 비롯, 시집장가 간 아들딸들의 은근한 경제적 지원 요청, 며느리와의 갈등에 이르기까지 내용도 각양각색이다. 하지만 결론은 언제나 한 가지다. ‘어쩌겠나, 현실이 그런 걸. 참고 살아야지. 부모 자식 간 관계가 미움으로 고착화 된다면 그것처럼 삭막한 게 어디 있겠나, 가족도 아니지’ 하는 것이다. 사회에선 그렇다 치더라도 가정에서조차 미움을 미움으로 굳혀버린다면 얼마나 삭막한 세상이 올까 상상해 보면 가정의 버팀목은 역시 나이든 부모들이란 생각이 든다. 자식들이 잘못하고 실수하고 섭섭하게 해도 사랑으로 감싸고 용서로서 보듬는 부모들의 ‘미워도 다시 한 번’ 그런 마음을 자식들은 알까 모를까. 진정한 마음은 옳음과 그름을 가릴 줄 아는 ‘시비지심’과 자기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는 ‘수오지심’이라 했던가. 오늘 나부터 부모에 대한 소홀함을 뒤늦게 반성하는 계기로 삼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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