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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구의 世上萬事]고애자(孤哀子)가 드리는 사부곡(思父曲)

 

고아(孤兒)가 됐다. 나이가 들었어도 고아는 고아다. 열흘 전인 15일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머니께서 천국으로 가신 지 꼭 1년 6개월만이다. 늘 어머니 곁으로 가시겠다는 말씀을 하시며 상실감에 시달리셨다. 돌아가시기 이틀 전 손주에게 큰 절을 받으셨다. 내년 2월 공과대학 졸업예정인 조카가 어렵다는 취업의 관문을 뚫고 건설회사에 입사해 UAE 아부다비로 떠나는 날이었다. 할아버지께 인사드리는 장면을 나는 사진도 찍었다. 근데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떠나보낸 손자를 섭섭해하실 것 같아 밤 늦게까지 아버지와 같이 있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버지와 평소 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그게 마지막이 됐다.

조카는 아직도 할아버지의 소식을 모른다. 터키에서 선교훈련을 받고 있는 나의 아들 부부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가슴이 미어졌지만 상심할 것 같은 생각에서다. 며칠이 지나 우리 아들은 인터넷에 떠 있는 부음을 보고 알았다며 전화로 울면서 오히려 나를 더 걱정했다. 입관할 때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많이도 울었다. 60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이제 기대고 어리광부릴 아버지 마저 저 세상으로 가시고 고아가 됐다고 생각하니 그동안 살아 생전 잘 해드리지 못 한 것이 못내 안타까운 생각에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4형제 모두 별 탈없이 사회 각 분야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친구들이 부러워했다고 늘 그러셨다. 일가(一家)를 이뤄놓으신 것에 만족해하시며 죽음을 준비하는 암시도 최근엔 자주 하시더니만 어머니 곁으로 홀연히 가셨다.

수많은 분들이 찾아와 애도하고, 4형제들을 위로해주었다. 아무리 위로를 받는다 하더라도 죽음 뒤에 남아있는 자식들의 슬픔과 안타까움을 돌이키기는 어렵다. 하지만 아버지를 아시는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평소의 인품과 식견을 이야기하며 추모할 때 작은 위로를 받으며 천국으로 가셨으리라는 확신했다. 발인을 끝내고 화장장에 어느 낯선 중년 여인이 서성거렸다. 당신의 아버님은 돌아가신지 30년이 됐는데 우리 아버님의 서울농대 후배로서 이천농고에서 같이 근무했었노라고 했다. 자신은 사립고교에서 35년 간 근무하고 지난 해 명예퇴임했다면서 신문의 부음란을 보고 찾아왔단다. 작고하신 아버님으로부터 우리 아버님에 관한 일화와 본받을 만한 인품을 평소 들어왔는데 장례식장에서 마지막 인사들 드리게 돼 죄스럽다고도 했다. 산소라도 꼭 찾아보겠다며 산소 위치를 묻고는 부의금까지 전해주고 갔다. 쉽지 않은 일이다. 이를 본 우리 유족들은 돌아가신 아버님의 인품을 다시한번 엿볼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 달력장사에 노점상으로 학비를 마련하셨고, 박봉에 겨울이면 잉크가 꽁꽁 얼어붙는 단칸방에서 네 아들과 함께 지내셨지만 한번도 우리에게 고생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농업을 공부한 분이라 늘 겸손하고, 세상을 관조하는 벼이삭의 진리와 생명의 소중함을 잊지 않았다. 후배를 보살피고, 어른을 공경하셨다. 연구와 탐구를 통해 미래지향적인 꿈도 소중히 여겼다. 1950년대 이천농고 근무시절 채소나 과일의 모종을 키우기 위해서는 창호지에 기름을 발라 썼다고 한다. 굵은 비가 오거나 우박이 떨어지면 모종은 망치기 일쑤였다. 아버님은 당시 폴리에스테르라는 물질에 착안해 창호 속의 온도와 폴리에스테르를 포장한 뒤 온도를 비교 연구해 낙희화학(럭키화학, LG화학)에 제안했다. 대성공이었다. 아버님의 연구는 비닐하우스 농법의 효시가 돼 우리나라 농업혁명을 일으킨 원동력이 됐다.

30대 교감, 40대 교장을 지냈다. 농업전공자로는 드믈게 장학관 연구관 교육장 학무국장 등 교육행정가로서도 교육계에 많은 족적을 남기셨다. 교직 말년에는 모교인 수원농고 교장과 한국농업교육협회장도 지내시며 생명산업 발전을 위해 끝까지 몸바치셨다. 영원하실 줄 알았던 아버지마저 이제 내 곁을 떠나 흙으로 돌아가셨다. 나 역시 이제 남은 날을 계수하며 아버님이 이루신 일가(一家)를 계승하고 그 훌륭함을 본받는 게 남은 일이다. 보고싶은 아버지, 부디 천국에서 영면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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