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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구의 世上萬事]마음 속의 전봇대를 먼저 뽑자

 

10년이 다 된 얘기지만 전봇대 사건이 화제가 됐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가 전남 영암군 대불국가산업단지를 방문했던 경험을 이야기했다. “트레일러가 지나갈 수 있도록 전봇대를 옮겨달라고 해도 몇 달이 돼도 안 옮긴다. 공장 유치하면 뭐 하느냐. 사소한 것도 안되는데”라고 했다. 대통령 당선자의 말 한마디에 공직자들이 움직였다. 당장 산업자원부 사무관 3명이 영암으로 특파됐다. 한전에선 대책회의가 열렸다. 그리고 다음날 전봇대는 뽑혔다. 언론들은 일제히 전봇대 하나 뽑는 일을 중계방송했다. 이를 기해 인수위는 ‘현장정치’를 이명박 코드로 삼았다. 현대건설 근무 시절 정주영 회장으로부터 배운 “해보기는 해봤어? 가보기는 가봤어?”를 실천했음직하다. 이경숙 인수위원장은 나아가 공직자들이 “마음의 전봇대를 뽑아야 한다”고 했다.

이 전봇대는 이른 바 규제개혁의 아이콘으로 등장했다. 바통을 이어받은 박근혜 대통령 역시 규제개혁을 부르짖는다. 규제는 ‘쳐부숴야 할 원수, 암덩어리’라고까지 했다. 규제 혁신 없이는 국가 미래가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는 그동안 밖에서 바라본 공직사회가 얼마나 무사안일하고 복지부동했는가를 보여주는 방증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일선 현장에서는 두 전·현직 대통령의 이같은 말들이 피부에 와닿지 않을 만큼 냉랭한 분위기다. 대통령만 열심히 떠들면 뭐하냐는 식이다. 국민이나 민원인들이 느끼는 체감효과는 별로이기 때문이다. 규제개혁과 변화의 주체인 공무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물론 이유는 있다. 감사가 두렵고 때로는 책임이 뒤따를 수밖에 없기에 그렇다. “규제개혁의 느슨함과 관련해 공무원을 일방적으로 질타할 일이 아니다. 관계법령을 폭넓게 해석해 민원인의 요청을 들어줬다가 정기 감사에서 법을 잘못 적용했다고 징계를 받으면 공무원으로서 큰 불이익을 받는다. 보수적으로 민원인을 대할 수밖에 없다”. 한 지자체 공무원의 얘기다. 법과 시행령에 근거해 감사받을텐데 우리보고 하라면 어쩌자는 것이냐 반문한다. 문제해결에 도움을 얻고자 상급기관이나 중앙부처에 질의를 해봐야 장황하게 법과 시행령을 설명해놓고 “귀 기관에서 적의 처리하시라”는 알맹이 없는 답변뿐이다. 각종 시행령에 ‘~~할 수 있다’이지만 안 되는 쪽으로 일단 해석한다. 귀찮아서다. 그래서 민원인들은 답답하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민원인을 대하는 게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책임질지도 모르기에 적극적인 행정을 펼치기는 고사하고 다른 부서에 떠넘기기 일쑤다.

며칠 본보에 규제개혁을 실천한 화성시 공무원들의 사례가 보도됐다. 공무원들의 적극적인 규제 개선 노력으로 어느 제조업체가 공장 증설을 할 수 있게 돼 연간 300억 원의 매출을 더 올릴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경기도와 국토교통부를 뛰어다니며 그동안 불합리했던 건축법 시행령 개정을 이끌어낸 것이다. 공무원으로서 당연한 일이라 하겠지만 대부분의 공무원들이 안 하는 게 문제다. 쉽지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는 심정으로 이전에는 민원인들이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민간인으로는 역부족이어서 공장설립을 아예 포기하는 사례도 많았다. 그러나 화성시 공무원들은 민원인의 편에 서서 기업하기 좋은 고장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전국 지자체들은 덕분에 덩달아 공장설립이 쉽게 됐다.

규제개혁은 공무원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행정의 마지막 단계인 기초자치단체와 읍면동이 열쇠를 쥐고 있다. 우리 주변에는 낡고 불합리한 규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수 십년 간, 아니 법이 제정되고부터 그대로인 법들도 너무나 많다. 시대는 변화하는데 행정과 제도는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게 문제다. 규제개혁도 일선 공무원만 다그쳐서는 곤란하다. 모든 법령과 제도, 낡은 관행들을 중앙부처가 먼저 정비하는 게 우선이다. 그래야 공무원들도 신나게 일할 수 있다. 전봇대는 어디에서나 존재한다. 공무원들의 마음에도 있다. 이 ‘마음 속의 전봇대’를 먼저 뽑아내는 게 규제개혁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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