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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구의 世上萬事]설날의 단상(斷想)

 

지금은 지구 온난화가 가속화하면서 겨울이 춥지 않은 편이다. 그런데 그 옛날의 설은 왜 그리도 추웠던지. 못 입고, 못 먹고 주위 환경이 녹록지 않은 탓이었을 게다. 영하 20도는 보통이었던 추위도 추위거니와 변변한 옷이나 신발도 없었다. 한 여름엔 ‘타이아표’ 검정 고무신 하나면 족했다. 국민학교(초등학교) 정문 앞에 뽑기 상품 중 최고는 새로 나온 15원짜리 라면이었다. 끓여 먹을 줄도 잘 몰라 스프를 뿌려 그냥 과자처럼 깨물어 먹었다. 세뱃돈으로 받은 10원짜리 지폐를 흔들며 가슴 뿌듯해했던 유년시절이 문득 생각난다. 어머니께서 방앗간에서 줄을 서 기다리다 금세 뽑아주신 가래떡은 왜 그리도 맛있었는지. 지금도 앉은 자리에서 서너 개는 거뜬히 해치운다.

화성시 매송면 송라리 시골을 떠나 선생님이셨던 아버지를 따라 소사(부천)에 살던 시절이다. 방학이라서 설 전날에는 시골엘 갔다. 먹고 살기 위해 인천으로, 수원으로, 소사로 뿔뿔이 흩어졌던 큰 아버님과 사촌형들이 한 데 모인다. 소사에서 수원으로 갈아타지 않고 오는 방법은 인천~영등포~수원을 오가는 태화버스였다. 1971년 실미도 군특수부대원들이 탈취했던 그 버스다. 지금도 생각하면 으스스한 기분이 든다. 어느 집이나 그랬겠지만 그때는 참 많이도 못 살았다. 그래도 설이 다가오면 어른들은 친척들과 같이 ‘설’을 쇠기 위해 이런저런 준비를 했다. 동네 이웃들과 돈을 걷어 소나 돼지도 잡아 나누었다. 어머니를 비롯한 여자들은 조청도 고고, 콩나물 기르고, 술도 담그면서 분주했다.

사랑방에서는 사촌 형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호롱불 아래서 밤을 지새운다. 섣달 그믐날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된다고 해서였던가. 설날 이른 아침이면 서둘러 우물가에서 고양이 세수를 하고 할아버지 할머니께 세배드릴 준비를 한다. 부모님과 그 형제자매들이 먼저 줄을 지어 세배를 드리고, 나같은 조무래기 아이들은 그 다음에 공수 자세를 취한 뒤 넙죽 절을 올린다. 그 조무래기 중 하나이던 나는 이제 세배드릴 부모님도 모두 안 계신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홀로 되신 아버님께 드린 세배가 마지막이었다. 덕담도 더 이상 들을 수가 없게 됐다. 이같은 나의 마음은 형님들도 마찬가지일 게다. 그래도 우리 가족이라는 일가(一家)를 이루어주신 것만으로도, 천수(天壽)를 누리고 하늘나라에서 편히 계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태양력의 1월 1일보다는 우리에게 설날은 예로부터 의미가 깊다. 묵은 해를 떨쳐 버리고 새로 맞이하는 한해의 첫 날이다. 엄밀히 말하면 병신년(丙申年)도 설날부터가 시작이다. ‘설’의 어원으로 ‘설다’ ‘낯설다’ 등의 ‘설’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 설을 삼가고 조심하는 날이라 하여 신일(愼日)이라고도 한다. 이는 ‘몸을 사린다’ ‘살금살금 걷는다’는 데서 나온 말이어서 매사에 조심하여 한해를 시작하라는 뜻인지도 모른다.

설날이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또 ‘떡국’이다. 우리 민족은 설날 아침에 떡국을 끓여 먹어야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속설이 있다. 하루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어린 시절, 떡국을 두 그릇 먹으면 나이를 두살 먹는 줄 알고, 배가 산이 되도록 먹었던 기억도 있다. 그런데 어느새 떡국 먹기가 두려운 나이가 되고 말았다. 떡의 흰색은 지난해의 안 좋았던 일을 모두 잊고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와 밝은 미래에 대한 기원을 담고 있다. 또 긴 가래떡은 무병장수와 집안의 번창을 의미한다.

모두가 즐거워해야 할 설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지만 마냥 반갑지 못한 이들도 있다. 극심한 취업난의 여파로 취업 준비생에게 설은 두려움 그 자체다. 명절 음식은커녕 끼니를 제때 채우지 못하는 우리의 이웃도 있다. 설 명절이 반갑지 않은 사람이 또 있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고 싸움에만 정신없는 국회의원들이 그들이다. 무슨 낯으로 고향에 내려가 4월 총선에서 표를 달라고 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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