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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물국수는 빗물에 말아야

 

장마 시작이라더니 아침부터 추적추적 빗발이다. 베란다 창틀에 멈칫멈칫 매달리다말고 뚝뚝 떨어지는 빗물을 보고 있자니. 시골 지붕 처마 끝에서 둥글게 둥글게 떨어지던 빗물의 잔상이 자꾸 생각났다. 잿빛 하늘에서는 구름이 어디론가 끊임없이 오고가고, 막연히 떠다니는 구름의 자유가 부럽기도 해서 우산 받치고 현관문을 나섰다. 빗물 흠뻑 머금은 이들 듬성듬성 앉아 웅성거리는 버스 안. 속내까지는 알 수 없지만 이웃인 듯 그림인 듯, 함께인 그들이 있어 나는 또 마음 푸근함을 느낀다.

통복시장이라는 말에 별 생각도 없이 버스에서 내리고 말았다. 꽁꽁 얼어붙은 러시아산 갈치 전을 지나 쪽파, 오이가 순서도 없이 나뒹구는 야채전도 지났다. 지붕을 씌어 비오는 날도 부담 없이 뽀송뽀송하게 변해있는 재래시장. 오백 원짜리 믹스커피를 배달하는 아주머니의 스트라이프 난방 소매를 보다말고 퍼뜩 스치는 무언가. 신발 전 앞에 물국수 돌돌 말아 밀가루 솔솔 뿌리고 손님을 기다리는 백발 할머니.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물국수 두 덩이만 주세요. 역시, 이 물국수는 비오는 날 먹는 게 최고지요?”

“그럼유, 물국수는 빗물에 말아야 제격이지유.”

더 둘러볼 것도 없이 돌아오기로 했다. 마치 소명을 다 한 듯 환한 미소를 안고 오른 버스. 차창으로 슬금슬금 흘러내리는 빗물. 저 빗물에 말아먹었던 그 옛날 물국수의 뜨끈뜨끈한 국물이 울컥울컥 삼켜졌다. 나와 고모만 알고 있을 그 짠하게 아프고도 그리운 국물 맛.

가족을 떠나 대구에서 혼자 자취를 하던 그 때. 피붙이 고모가 가까이 있어 쓸쓸할 땐 자주 찾아가곤 했다. 딸이 셋이나 되었던 고모는 끼니 때가 되면 늘 국수를 끓였다. 천 원짜리 한 장 쥐어주며 “상남아, 국수전에 가서 소면 쫌 사온네이.”

“오늘은 무슨 국순 줄 알제? 비온다 아이가, 오늘은 물국수데이.”

평소에는 고춧가루 솔솔 흩뿌린 잔치국수, 비오는 날엔 영락없이, 축축하게 막 썰어서 난전에 내놓고 팔곤 하는 물국수를 사다 끓인 뜨끈뜨끈한 칼국수. 우리 고모 국수요리 하나는 정말 최고라고 생각했었다 철도 없이 영문도 모르고. 몇 해가 지나서야 알 수가 있었다. 쌀이 없어서 밥을 할 수가 없어서 국수를 끓여낼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고모부의 사업 실패로 끼니걱정을 해야 했지만 눈치도 없는 어린 나에게 차마 그것까지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후 나는 한 동안 국수를 멀리했었다. 자꾸 울컥거려서 국수국물이 삼켜지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언제부턴가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면 늘 물국수를 본능처럼 그리워하게 되었다. 물국수 국물에 담긴 은근한 고모의 사랑, 애잔한 가족사, 아련한 그 추억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이와 더불어 지나간 것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도 점점 더 커진 게 아닐까 싶다.

“역시 비오는 날엔 울 엄마 칼국수 잔치!”

“오늘 국물 맛 최고예요!”

“친구가 보내준 송화버섯을 넣어서 그런가, 더 맛있지?”

막 끓여낸 뜨끈뜨끈한 칼국수 한 그릇씩 앞에 놓고 온 가족이 시끌벅적 자화자찬이다. 언젠가 시간지나, 비오는 날 빗물에 말아먹을 수밖에 없었던 나의 이 칼국수 사랑을 기억하는 가족이 또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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