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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쇠고기가 아니라 세곡이라구요

 

살아있거나 죽었거나 생명이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모든 것에는 다 이름이 있다. 동식물도 그렇고 무생물에게도 자기만의 특징을 나타내는 이름이 있다. 이름만 들어도 그 대상에 대해서 어느 정도 파악을 하게 된다. 별은 듣는 순간 꿈을 꾸게 하고 꽃은 아름다운 모습을 상상하게 하며 돌은 벌써 단단함을 느끼게 한다. 불은 다급하고 뜨거운 느낌을 주고 물은 가슴속까지 시원하게 하고 바람은 벌써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움과 불현듯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일게 한다. 이렇듯 이름이 같은 의미와 역할은 크다고 하겠다.

그 중 사람은 유독 그 사람의 출신과 가문별로 이미 정해진 행렬자를 넣어서 이름을 짓는 것은 물론 출생과 관계된 사건 또는 성장하면서 갖추게 될 됨됨이나 이루기를 바라는 소망을 이름자로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 이름이 운명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다른 사람들 입을 통해 불리는 동안 이름이 갖는 의미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고 기대를 품게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름을 지을 때 대체로 한자를 쓰기 때문에 발음이 원활하지 않아 다른 사람이 잘 알아듣기 어려운 경우도 있고 또 좋은 뜻이 담겨있다고는 해도 우리말로 읽을 때 전혀 다른 의미가 되기도 하고 더러는 놀림감이 되기도 한다. 나도 어릴 적에는 내 이름에 불만이 많았었다. 우선 다른 여자애들처럼 예쁜 이름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한 번에 전달되는 그런 이름도 아니었다. 더욱이 전화상으로는 몇 차례를 말하거나 숫제 한자 한자 풀어서 불러주어야 한다. 지금도 내 이름을 한 번에 알아듣는 사람을 별로 만나지 못했다.

새 학년이 되고 며칠 지나면 낯선 친구들 앞에서 자기가 사는 곳을 말해야 하는 일이 생긴다. 내 차례가 다가오면 언제나 걱정부터 앞선다. 그리고 그 걱정이 현실이 되는 시간은 별로 멀지 않았다. 나는 나름대로 또박또박 발음을 한다. “세곡이요.” 순간 선생님의 의아하던 표정은 웃음으로 바뀌면서 “쇠고기? 너 정말 비싼 동네 사는구나!” 교실은 웃음바다가 되고 나는 세골, 밭세골…. 반복될수록 내 목소리는 점점 기어들어가고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시골, 시꼴 등등의 놀림이 꼬리를 물었다. 겨우 외세곡이라는 지명을 찾아 적으셨고 나는 숨어버리고 싶은 시간을 견뎌야 했다.

도로명 주소가 도입되면서 도로 표지판이 설치되고 우리 집에도 새로운 주소가 부여되었다. 바쁘게 사느라 처음엔 느끼지 못했는데 한 번씩 지나다 보면 무언가 이상한 도로명이 눈에 들어온다. 새마을안길로 부르던 길을 새마을옛로라는 표지판이 붙었다. 혼자 몇 차례나 발음을 해 보아도 입에 설다. 내 입에 설다면 듣는 사람 귀에는 익을까? 이런 곳이 한두 곳일 리는 만무하다. 무슨무슨 길이라고 표기해도 충분히 이해가 될 터인데 부득이 아름다운 우리말 이름을 버리면서 억지로 한자어를 끌어다 붙여야 했는지 좀 더 신중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우리 지역에 사라져가는 지명을 불러보고 싶어진다. 꾀꼬리 노래가 그치지 않았다는 꾀꼴봉, 다랑논이 산마루까지 닿았다는 산다랑이, 산골 샘물이 한해 농사를 짓던 하늘샘이, 보름달처럼 둥글고 밝던 보름골, 냇물이 비단처럼 빛나던 비단소, 연분홍 살구꽃이 얼마나 많이 피었을까 그려보는 살구재, 소나무 숲이 아늑했을 솔안처럼 고운 이름을 앞으로도 오랫동안 전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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