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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별헤는 밤’에 되뇌어본다 윤동주의 부끄럼 잊지 말자고

별의 시인 윤동주의 숨결을 따라

 

대련역서 백두산 천지까지 ‘20시간’
1446개 계단 오르니 비경에 ‘우와~’

윤동주 모교 둘러보며 시인의 숨결 느껴
자금 부족에 윤동주전람관은 건설 중단

안중근 의사 수감됐던 뤼순 감옥 방문
독립운동가 항일 정신에 ‘가슴이 먹먹’

 

 

연길에서 보았던 파란 하늘과 뽀얗고 포근한 구름이 아직도 생각난다.
윤동주 시인이 바라보던 밤하늘도 이렇지 않았을까?

수원문인협회 임원들이 지난 1일부터 7일까지 ‘윤동주 시인’, ‘안중근 의사’ 등을 찾아 ‘대련, 백두산, 연길’ 문학기행을 다녀왔다.

지난해 12월 수원문협에서 ‘윤동주 문학기행’을 기획하고 공지하자마자 나는 여행비를 바로 입금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윤동주 시인의 숨결을 찾아간다는 데에 망설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천공항에서 밤 비행기로 대련까지 날아갔고, 설레는 마음으로 7일간의 여정에 올랐다. 시차는 한국보다 한 시간 늦었으며 도착하자마자 3인 1조로 편성해 택시를 잡아타고 숙소에 도착, 다음 일정을 위하여 잠을 푹 잤다.

날이 밝자 관광버스를 타고 고구려 시대의 최남단 방어 요새 유적인 비사성 트레킹에 나섰다. 입장료는 20위안(약 3,600원), 2시간 반 정도 코스였는데 씩씩한 기상을 북방에 떨치던 고구려인이 돼 무더위에도 지친 기색 없이 걸었다.

매미소리, 계곡물 흐르는 소리, 싱그러운 숲의 내음 만끽하며 산을 오르다보니 석고사 절이 나왔고 곧이어 당왕전에 다다랐다. 실제 요새인 비사성을 본떠 만든 모형인데 크고 웅장했다. 100여 미터쯤 가니 비사성이 있었다. 시야가 탁 트인 것이 과연 천혜의 요새였다. 내려오는 아스팔트 도로에서도 우리 일행은 고구려인들의 기개를 이야기하며 어깨를 쭉 펴고 당당히 걸었다.

대련역에서 오후 2시에 6인 1실 침대열차를 타고 다음날 오전 7시 43분에 송강하역에 도착했다. 17시간 43분간의 열차여행이었다. 끝없는 옥수수밭이 펼쳐졌다.

송강하역에 내려 백두산 천지로 향하는 관광버스까지 걷다보니 토끼풀꽃이 무성하게 피어 있는 화단이 있어 잠시 앉아 살펴봤다. 네잎클로버가 수두룩하게 피어 있어 얼른 따서 일행들에게 나눠 줬다. 천지는 맑게 개인 날이 드물어 삼 대에 걸쳐 덕을 쌓아야 볼 수 있고, 네 번을 올라가야 한 번 볼까 말까 하다는데 ‘우리 일행이 백두산 천지를 보게 해주십사’ 하고 소원을 빌었다.

기행 셋째 날에 송강하역에서 버스를 타고 백두산 천지 서파코스로 이동하는데 인파가 몰려 정체가 심했으며 역주행하는 승용차, 중앙선을 넘는 운전, 교통사고가 나서 교통경찰이 처리하는 모습 등이 목격됐다. 2시간이 넘는 긴 여정이었으나 차창 밖으로 끝없이 지나가는 자작나무와 잣나무를 원없이 보며 목적지에 다다랐다.

서파에서 표를 끊고 두 시간 반을 땡볕에 서서 기다린 끝에 서파 천지 가는 셔틀버스를 탈 수 있었다. 40여 분 산행 끝에 1,446개의 목책 계단을 오르니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우와~’라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서파 천지에서 시원한 바람을 만끽하며 구경하는 인파들을 뚫고 천지의 시원한 파란색이 잘 보이는 곳에서 사진을 몇 장 찍고 하산을 시작했는데, 고운 엉겅퀴, 들국화 등이 발길을 자꾸만 붙잡았다. 우리의 백두산이 이다지도 아름다웠단 말인가. 매표소로 내려와 한 시간 반 정도 관광버스로 이동하여 이도백하에 도착하여 숙소에 여장을 풀었다.

넷째 날은 북파매표소에서 표를 끊느라 2시간 24분간 땡볕에서 기다리면서 밥 대신 고구마 반 개와 계란 한 알로 점심을 대신했다. 덕분에 장백폭포와 천지를 영접할 수 있었다. 서파 쪽보다 웅장하고 기품이 있는 천지의 모습을 발견했고 그 감동은 지금도 생생하다.

다섯째 날은 가곡 ‘선구자’에 나오는 일송정과 해란강을 보러 갔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던 우리의 애국지사들이 가파른 길을 올라 정자 모양의 소나무 앞에 모여 애국투혼을 다짐하던 장소여서 우리는 버스 안에서부터 ‘선구자’ 노래를 부르며 마음을 가다듬고 일송정과 해란강을 마주했다.

다음은 윤동주 시인의 모교인 대성중학교(지금은 용정제일중학교)로 이동했는데 지금은 방학이어서 학생들이 없었고, 그 옆의 대성중학교(청소년애국주의교육기지) 전시관에 갔다. 별의 시인 윤동주 흉상과 시비가 세워져 있었고 윤동주 시인이 공부하던 교실이 있었다. ‘서시’ 악보가 그려져 있는 칠판과 둘씩 앉을 수 있는 책걸상이 있었기에 우리는 윤동주 시인의 숨결을 느껴보고자 걸상에 앉아 보기도 했다.

다음으로 용정 지역의 훌륭한 인물들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자율적으로 기부금 액수를 적고 모금함에 돈을 넣었다. 나는 서점에 들러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발간한 윤동주 시집과 청송 심련수 시조집을 샀다. 수익금이 발전기금으로 쓰인다는 말에 우리 일행은 저마다 손에 시집을 들고 나왔다.

다음으로 명동촌에 있는 윤동주 생가를 방문했다. 커다란 나무 대문 옆에 있는 커다란 돌에 ‘중국조선족애국시인 윤동주 생가’라고 씌어 있었다. 입장료는 30위안(약 5,400원)이고, 윤동주 시인의 시를 돌에 새겨 배치했다.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명동교회당 건물 안에는 명동역사박물관이 있었다.

우리는 명동촌 촌장님이 운영하는 매점에서 커피를 사먹었는데, 이 커피값 역시 기금으로 쓰인다고 한다. 윤동주 시인의 책도 30위안씩 팔고 있어서 더러는 책을 사는 일행도 있었다. 우리 일행은 윤동주 시인의 생가 마루에 앉아 명동촌 촌장님께 윤동주전람관을 짓고 있는데 자금이 부족해 중단하고 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여섯째 날 중국과 북한의 국경인 도문으로 향해 두만강에 손을 담그고 보트를 타고 돌아오면서 북한쪽 초소의 병사들도 보았다. 두만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의 반은 중국 땅, 반은 북한 땅이라고 한다.

또다시 연길역에서 18시간 동안 침대열차를 타고 새벽에 대련에 도착한 수원문협 임원들은 일곱째 날 렌트카를 타고 노호탄해변공원, 뤼순(여순) 감옥에 가서 독립운동가 안중근과 신채호, 이회영 박희광 등이 수감됐던 기록들을 참관했다.

이 감옥에는 1906년부터 1936년까지 11개국의 항일운동가 약 2만여 명이 수감됐다. 안중근 의사의 전시실과 감옥 내부, 사형장 등을 보는 내내 가슴이 먹먹해 발걸음이 무거웠다. 민족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부당한 재판과정을 거쳐 감옥에서 억울하게 사형을 당했는데, 안중근 의사의 유언은 다음과 같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옆에 묻어두었다가 나라를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후략)’

하지만 아직도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 당시에 일제는 안 의사의 시신을 매장한 곳의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밤 11시였다. 연길에서 보았던 파란 하늘과 뽀얗고 포근한 구름이 아직도 생각난다. 윤동주 시인이 바라보던 밤하늘도 이렇지 않았을까?



/글=권월자 시인·수필가(수원문학 수필분과위원장·연무초등학교 교장)

/정리=민경화기자 mk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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