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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에 휴전의 긴장감을… 또 한걸음에 민족의 슬픔이…

 

 

대명항 지나면 남북 가른 철책선만이 끝없이
60년 만에 허락된 해안길 원초적 자연 그대로
신미양요때 美 물리친 덕포진엔 조상의 기개 가득

성곽만 남은 문수산성… 13C 대몽항쟁의 흔적
갈라진 민통선 마을 조강리엔 짙은 그리움만
애기봉 오르면 북녘땅이 손에 잡힐 듯 펼쳐져


많은 이들에게 강화도로 가는 길목으로만 여겨지는 김포는 찬찬히 눈길을 두며 걸을 필요가 있다. 5천여년 역사가 새겨져있는 유적들과 북녘땅이 한눈에 보이는 애기봉, 대명항 등 다양한 볼거리로 그 매력에 흠뻑 취하기 충분한 곳이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은 전쟁, 남과 북의 현실 앞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통일을 위한 염원과 휴전상태라는 긴장감은 걷는 이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만 한다. 평화누리길 12코스(191㎞) 가운데 ‘분단의 현장을 느끼며 민족의 슬픔을 헤아리는 길’, 평화누리길 초입에 자리하고 있는 염하강철책길(1코스)과 조강철책길(2코스)이 바로 그곳으로 이 곳에 녹아 있는 역사적 배경을 따라 함께 걸어보자.



■ 우리 민족의 전쟁사와 슬픔을 보듬고 있는 길, 조강철책길

오랜시간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아 빼어난 자연풍광과 역사가 남겨져있는 이 곳은 외세에 맞선 우리 근세사의 역사 유적이 해안을 따라 이어진다.

평야지대인 김포가 바다와 닿아 만들어진 포구, 대명항은 과거 인천과 강화를 오가는 유일한 뱃길이었다.

작은 포구였던 대명나루는 지난 2000년 2종 어항으로 승격하면서 이름이 ‘대명항’으로 바뀌고 이듬해 강화도를 잇는 ‘초지대교’가 개통되면서 옛 나루터의 비릿한 정취는 사라졌다.

이곳을 지나면 두 세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는 흙길이 펼쳐지고 길 왼편으로 3m 높이의 철책이 끝없이 이어진다.

철책 너머로는 강화해협과 가랑잎처럼 떠 있는 강화도가 한 눈에 들어온다. 강화해협은 그 모습이 강과 비슷하다해서 염하(鹽河), 소금물이 흐르는 강이라고도 불린다. 이름은 강이지만 이곳은 강화도와 김포 사이를 흐르는 엄연한 바다다.

이곳 철책은 간첩 침투를 막기위해 한국전쟁 이후 설치됐다.
 

 

 

 


바다와 길을 명확하게 구분짓는 철책은 새삼 이 땅이 지닌 분단 현실과 마주하게끔 이끈다.

그래서인지 이곳의 철책 외길은 시작부터 걷는 이에게 시간이 더디게만 느껴지게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됐던 곳이다보니 원초적인 자연의 모습이 그대로 남겨져있다. 인근에 주둔한 해병대의 군찰로로 이용됐지만 김포시와 군부대의 지속적 협의 끝에 드디어 60년간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던 그 땅이 다시 우리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염하강을 따라 길게 늘어선 철책은 비단 육지와 바다의 경계만을 나누는 것이 아니다. 이쪽과 저쪽을 구분하는 선, 남과 북이 나눠져있다는 그 선만으로 발걸음을 떼기조차 버거워진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강 같은 바다를 옆에 두고 철책 외길을 걷다보면 어느새 둑길로 이어진다.

과거 외적을 막기위해 쌓은 토성으로 구불구불 이어진 둑길의 마지막엔 덕포진이 기다리고 있다.

덕포진은 국가지정 제292호 사적지로 강화만을 거쳐 서울로 진입하는 길목인 ‘손돌목’의 지형을 이용한 조선시대 군영이다.

돌아나가듯 굽이도는 강화해협의 물살을 ‘손돌목’이라 하는데 이 말이 생긴데는 뱃사공 손돌의 억울함 죽음에서 시작됐다. 목숨을 걸고 강화로 피신하는 왕을 안내했던 뱃사공 손돌이 억울하게 오해를 받아 살해를 당했는데 이 억울함 죽음은 덕포진 끝자락 작은 비석으로만 남겨져있다.

덕포진은 조선군이 두차례나 역사적 승리를 이룬 곳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 때부터 전쟁의 격전지로서의 상처가 새겨져있을 것이다.

1866년 병인양요 때 별군관 이기조의 지휘로 철수하는 프랑스군을 요격했고 1871년 신미양요때는 통상을 거절한 조선 조정을 공격하기위해 미국 해병대가 한강 어귀로 향하는 것을 이곳에서 발포해 퇴각시켰다.

역사적 사연 탓인지 토성에 올라 서해를 바라보노라면 16세의 무기로 열강이 가진 19세기 총포에 대항해 분주히 움직이는 조선 범포수(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막아낸 조선군대의 주력부대가 평안도에서 차출돼 구성된 백두산 호랑이 사냥꾼)들의 기개와 결의에 찬 모습이 그려지는 것만 같다.

이곳을 지나 다시 만나게 되는 철책길은 사뭇 긴장감에 휩싸이게 만든다.

강화도에서 간간히 들려오는 포성 소리가 깔리고 경사진 곳을 따라 줄을 잡고 걷는 길, 폐타이어로 구성된 구간을 지나다보면 넘어가지 못할 곳을 바라보기만 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먹먹함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온다.

염하강을 따라 철책선과 논길, 숲길로 이어지는 이 길은 문수산성 입구에서 끝이 난다.
 

 

 


드문드문 설치된 초소들의 모습이 아직 채 끝마치지 못한 숙제와 같은 우리의 휴전 상황, 전 세계 유일한 대치 국가임을 명백히 보여주지만, 그 마저도 우리가 안고 가야할 짐이란 현실에 맞닥뜨린다.

긴장과 평화, 원초적인 자연, 바다와 들, 숲이 어우러진 길, 이 곳에서 우리는 평화와 통일을 향한 염원을 시작하게 될지도 모른다.



 

 

 

■ 철책선을 따라 분단의 현장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그 곳, 염하강철책길



남과 북이 맞닿은 민간인 통제구역이 있는 곳, 김포 조강철책길은 바다와 물이, 산과 들녘이, 저수지와 평야가 서로 맞닿아있다.

사계절 경치가 아름다워 ‘김포의 금강’이라 불리는 문수산에서 시작되는데 산 입구에 서면 앞쪽 언덕 위로 반듯하게 자리 잡은 문수산성 남문이 보인다.

강화 갑곶진과 더불어 강화해협을 지키는 요새였던 이곳은 멀리는 대몽항쟁의 이야기가 있고 가깝게는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과 격전을 치른 곳이기도 하다.

대몽항쟁은 1231년~1259년 7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입한 몽골에 맞서 충청북도 제천 지역을 포함한 전역에서 일어난 항쟁이다.

고려의 최씨 무신 정권이 안정되던 무렵인 13세기초 몽골족이 금을 대신해 대륙을 지배했다. 칭기즈칸은 북중국을 장악한 후 남송과 고려, 일본까지 정복하려했는데 고려가 1219년 몽골군의 도움을 받아 거란족을 몰아낸 일을 빌미로 몽골이 과도한 공물을 요구하면서 최씨 정권과 갈등이 시작됐다.

이후 몽골 사신이 귀국 도중 압록강에서 살해되면서 충돌의 계기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외세와의 큰 격전을 알게 해주듯 지금은 성곽만이 자리하고 있다.

문수산성 남문에서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하면 부드러운 능선 위로 산성 길에 다닿게 되고 아름다운 노송들을 만끽할 수 있다.

영원한 한반도의 할아비 강, 조강(祖江)의 풍경 앞에 서면 그 품이 매우 넓어 가늠하기가 어렵다.

애기봉과 문수산 사이의 월곶면 조강리에는 유명한 조강포가 있는데 서해 뱃길과 한양, 개성을 잇는 수운의 요충지였다고 한다.

항상 뱃사람과 나룻배를 기다리는 손님, 장사꾼들로 떠들썩했을 포구는 서해안에서 올라온 배들이 물참(만조)을 기다렸다 밀물에 배를 띄워 한양으로 갔다고 전해진다.

북한강과 남한강을 합쳐 도도히 흘러온 한강과 한탄강물을 이끌고 온 임진강이 합쳐지는 물길이 서해로 좀 더 흐르다 북한 개성을 지나온 예성강까지 받아들이는 조강(助江)의 품 속에서 마음껏 속얘기들을 꺼내보고 싶은 욕구에 사무친다.

그렇게 걸어 온 길들 사이 북쪽으로 해안선을 따라 완고하게 늘어선 철책길과 그 오른쪽 접경지 마을 풍경은 다시금 마음을 무겁게 만들고 만다. 마을 사람들도 쉬이 한강 물을 만져볼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그 곳에서 분단 현실은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다.

산길이 유순해지는가 싶더니 널찍한 임도가 나온다. 청룡대로를 지나면 긴장감과 평화로움이 동시에 밀려드는 민통선 마을 조강리를 만나게 된다.

강마을이지만 강은 보이지 않고 민통선 마을이지만 철책이나 병사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마을 끝으로 발걸음을 내딛다보면 바리게이트와 함께 병사들에게 길을 막혀버린다.

조강리는 조강저수지까지만 갈 수 있다. 더 가고 싶지만, 갈 수 있어야만 하는 곳이지만 멈춰야만 하는 길, 이어지는 그 길 위에서 한참을 서성이게 된다.

전쟁 전 남북 나루터였던 조강리는 한 동네였지만 지금은 북쪽에 윗 조강리와 아랫 조강리가 있다. 전쟁이 강을 사이에 두고 마을마저도 갈라놓아버렸다. 가지 못하는 그 길 위에서 짙어지는 그리움은 감출 수 없다.

분단의 흉터로 남은 철책길이 막아선 조강리 마을길을 뒤로 한채 걸어가는 길은 애기봉까지 이어진다.

바라볼 수 밖에 없는 북녘땅과 통일을 생각하다보면 어린 기녀의 전설이 담긴 애기봉과 마주하게 된다.

애기봉(155m)은 한국전쟁의 격전지였으며 평안감사의 애첩 ‘애기’의 전설로 유명하다. 애기봉은 154고지라고도 불렸고 한국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여진 곳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부터 1.8㎞에 위치하는 북한 개성직할시 판문군 조강리 일대를 최단거리에 볼 수 있는 전망대. 간단한 출입신고서를 쓰면 누구나 이 전망대를 오를 수 있다.

개성의 송악산, 손에 잡힐 듯 눈 앞에 펼쳐진 북녘땅, 북한의 회색빛 공동주택, 민둥산과 무덤, 소달구지 모습까지 망원경 너머 그들은 마음 속에 선명히 새겨진다.

민통선이란 단어가 역사속으로 사라질 그 날을 그리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돌려본다./이슬하기자 rach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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