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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성칼럼]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인생이 가을같이 익어가오, 자네 소리하게 내 북을 치지’ 어제 출근길 수원역에서 우연히 본 광고판 글을 읽고 잠시 회상에 젖었었다. 그렇잖아도 가을이 되면 마음속엔 미래보다 과거의 추억이 더 많이 자리 잡는다고 하는데 글마저 왠지 울림이 있어 잠시 생각 속 여행도 떠났다. 옛날에 듣던 음악을 떠올리며.

그리고 시쳇말로 ‘가을’을 타게 하는 음률과 반주소리가 좋아 꽤나 흥얼거렸던, ‘가을을 남기고 떠난 사랑/ 겨울은 아직 멀리 있는데/ 사랑할수록 깊어가는 슬픔에/ 눈물은 향기로운 꿈이었나/ …’라는 노래를 떠올리니 젊은 시절 낭만이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기억 한켠에서 기지개를 켰다.

덩달아 기자 초년병 시절, 가을만 되면 숱하게 부르고 들은 노래도 기억났다. “우 우우우…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으로 시작하는 ‘잊혀진 계절’. 마치 떨어지는 가을 낙엽을 연상시키는 피아노 반주를 어디 나만 사랑했을까마는 노랫말 속에 녹아있는 서정적인 분위기는 언제 기억해도 새롭다. 듣는 이들에게 추억을 하나쯤 생각나게 해서 그럴까. 아니면 모든 이별에는 메아리치는 변명이 있지만 무표정으로 헤어진 뒤, 그때 미처 못 했던 말을 이후 내내 곱씹는 절절한 심경을 공감해서 그럴까. 아무튼 가을만 되면 수많은 사람들의 애창곡으로 남아 쓸쓸함과 위안을 전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가을은 풍성함 속에서 빈곤을 인지하는 센티멘털의 계절’이라 이야기한다. ‘가을이기에 그렇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가을에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뭘까. 그리고 뭔가 축 가라앉는 느낌은 또 무엇인가. 내면을 향한 손짓에 울림이 없다면 영락없는 우울 증세다. 하지만 자아에 대한 내밀한 감각을 강하고 섬세하게 일깨워 주는 게 분명한 것으로 봐선 우울증과 확연히 다르다.

가을이 생각을 많이 들게 하는 것은 사람을 그리워하게 하는 것도 한몫하고 있다. 인간관계에 대한 여러 감흥이 필연적으로 일어나면 생각은 과거로의 여행을 진하게 하게 마련이어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가을에 생각을 많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 자신과 깊은 곳에서의 대화가 부단히 이루어져서다. 자기만 아는 내면의 깊숙한 또 다른 나와 만나, 지나옴을 반추하고 앞으로의 남은 나날을 이야기 할 때 그 어떤 누구도 현실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겠는가. 또 어느 누구고 생각이 많아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가을을 인생에 비유하자면 아마도 중년기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약해지는 가을볕이 몸의 변화를 가져왔다는 이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같은 변화는 자연의 이치에 따른 자연스러운 순항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지나온 과거에 대한 아쉬움과 남은 날에 대한 염려가 더해져 만들어낸 현상이다.

가을이 주는 울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심과 차별 없이 자기를 보듬고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게 그것이다. 생각은 공허하고 심난하지만 몸 안에 나직이 웅크리고 있는 이 같은 ‘힘’을 발견하면 텅 빈 가슴마저 꽉 찬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죽어야만 헤어질 영육 간 동반자로의 깨달음도 얻게 되며 복잡한 세상 인간관계에서 오는 미움과 질투, 이 모든 게 부질없다는 생각도 더불어 하게 된다. 가을 낙엽처럼 메마른 가슴을 적셔주는 매혹적 울림이다. 가을날 떨어지는 낙엽에서 얻는 것도 있다. 타고난 지성과 지혜도 시간이란 무게에 치이면 휴지처럼 나뒹굴고, 쌓아놓은 명예와 부귀도 가는 세월의 빈 뜨락 앞에선 쭉정이가 된다는 사실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비록 가을이지만 세상의 복잡한 일, 그리고 인간관계에서 오는 질투와 미움이 다 한밤의 꿈처럼 펼쳐진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겠습니다”라고 시작하는 민족시인 윤동주의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이라는 시가 있다. 세월의 가을이 아닌 인생의 가을을 노래한 것이어서 계절의 변곡점을 지날 때마다 생각나는 시다. 올 가을엔, 시구(詩句)처럼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열심히 살았는지, 상처를 주지는 않았는지, 아름다운 삶을 살았는지, 어떤 열매를 맺었는지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앞으로 남은 인생을 의미 있게 채우기 위해 뭘 해야 할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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