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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 한가운데 썰어놓은 무채가 큰 통에 가득하다. 김장배추 소를 만들기 위하여 늦은 밤까지 어머니와 아내가 썰어놓은 것이다.

나는 조금 거들기는 했지만 생색을 낼 정도는 아니었다. 새로 시작한 건축 현장일이 걱정이 되어 이른 새벽 출근을 하는데 거실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무채가 도망가지 말라고 어디를 가냐고 핀잔의 말을 걸어오는 듯 했다.

주머니 속에 전화벨이 울린다. 아침을 먹으러 들어오라기에 바빠서 못 들어 간다하니 그래도 김장 소는 버무려줬으면 한다. 전화를 끊고 나니 마음이 편치 않다. 무채와 양념을 버무려 김장 속을 만드는 일이 보통일이 아닌걸 알기에 중요한 일만 챙기고 집으로 들어갔다.

무채가 담긴 그릇 옆으로 고춧가루 젓갈 마늘 파 갓 등 양념이 즐비하다. 고무장갑을 끼고 양념을 적당하게 넣어가며 무채를 버무리는데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한참을 버무려 일을 마쳤을 때는 온몸이 땀범벅이 될 정도가 되었다. 김장 담그기 중에 제일 힘든 것이 배추에 넣을 소를 만드는 일이라며 다른 일은 몰라도 그 일을 해달라는 주문이 해마다 있다. 해보고 나면 이렇게 힘든 일이니 해달라는 것인데도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선뜻 앞장서서 하지는 못하고 부탁이나 해야 하는데 그래도 흐뭇한 표정으로 고마워하는 아내를 보면 괜히 미안해진다.

겨울 반양식이라며 김장을 담그던 시절에 비하면 많이 줄었으나 지금도 꽤 많은 편이다. 올해부터는 두 아들네 김장까지 담가야 하니 제법 많은 양인데도 즐겁게 김 장 담그기를 하는 아내를 보면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텃밭에 농사를 직접 지어 담그는 김장은 인기가 대단하다. 도시에 사는 형제와 평소 가까이 지내는 이웃 그리고 애들 김장까지 하다 보니 배추포기가 산만큼 쌓인다. 두 접 정도 되는 김장이니 힘들다고 불평을 할만도 한데 마냥 즐거워한다. 무 배추는 물론 고추까지 직접 농사를 지어 담그는 김장에 마냥 흐뭇하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언젠가 아내가 한 말이 생각이 난다.

시골에 가서 살게 되면 다른 건 몰라도 고추농사는 직접 지어 김장 담글때는 고춧가루 아낌없이 듬뿍 넣어서 맛깔스런 빨간 김치를 만들어 먹고 싶다고 했다. 그러더니 정말 시골로 이사를 와서 살면서는 늘 그렇게 하고 있다. 뜨거운 뙤약볕에서도 고추농사에 쏟는 정성이라니 이루 말할 수 없다. 워낙 손이 많이 가고 힘든 농사라 웬만하면 사서 먹자해도 도통 말을 듣지 않는다. 다른 건 몰라도 고추를 비롯한 야채는 필히 직접 가꾸어서 먹어야 한단다. 그러다 보니 일류 농사꾼 아낙이 다되었고 참깨 들깨는 물론 옥수수 감자 콩까지 농작물의 가지 수도 많이 늘었다.

큰일을 해냈다는 안도감인지 저녁을 먹고 피곤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것도 같은데 여유 있는 모습으로 티브이를 시청하기에 통닭 한 마리 사다줄까 하니 맥주도 부탁을 한단다. 싸늘한 기운이 도는 밤이지만 시내까지 나가야 하는 수고스러움을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통닭과 캔 맥주를 사왔다. 맛있게 마시는 모습을 보니 행복이란 이런 것인가 싶다. 힘들다 투정을 부리며 내년에는 안할 거야 할만도 한데 오히려 뿌듯해 하는 모습을 봐온지도 꽤나 오랜 세월이 됐다. 김장이 귀찮고 힘들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가족과 이웃의 사랑을 담구고 가꾸는 행복한 연례행사로 조상들의 지혜의 산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올 김장도 감사한 마음으로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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