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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희의 미술이야기]침묵의 4분 33초

 

거리에는 수많은 불빛들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고, 언론은 연일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치열하게 전하고 있다. 불빛들은 매우 차분하다. 강물의 속도는 찬찬해도 수량이 풍부하기 때문에 큰 힘을 형성했다. 특별한 기운이 너무나 풍성하게 차올랐고, 한편에서는 이 때문에 너무나 바쁘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예술이 가져올 수 있는 입지란 거의 남아있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만으로 충분히 만족해 할 만한 예술도 있다. 다비드와 들라크루아는 뜨거움으로 상징되는 역사의 혁명에서 선봉장 역할을 해냈지만, 그보다는 오늘은 자기 자신을 관객들에게, 혹은 우연적인 상황들에 내주었던 전혀 다른 형식의 예술을 더듬어보았으면 한다.

1972년 존 케이지는 보스턴 하버드 광장에서 ‘4분 33초’라는 곡을 연주한다. 그는 수많은 인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랜드 피아노 앞에 서서는 시계를 올려놓더니 피아노 뚜껑을 닫고 앉았다. 악장은 총 세 개였으며 각각의 길이는 33초, 2분 40초, 1분 20초였고, 악보에는 ‘침묵’이라는 의미의 ‘TACET’이라는 지시어만이 적혀있었다. 4분 33초는 피아노 소리 대신 오롯이 객석과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로 채워졌다. 궁금해 하며 집중하는 기운도, 그러다가 이내 지루해하는 기운도 담겼을 것이다. 곡은 그보다 20년 전에 작곡되었고 사람들도 이 곡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을 터, 아주 큰 소요는 없었을 것이다. 광장에서 이루어진 퍼포먼스이니 홀 안에서는 들을 수 없는 도시의 소음도 담겼을 것이다. 존 케이지는 4분 33초를 채운 이 모든 것들이 그 자체로 완전한 음악이라고 여겼다. 그는 악보의 지시대로 피아노 앞에 앉아 4분 33초 동안 침묵을 지킨 후 피아노 뚜껑을 도로 열어놓고 무대를 내려왔다.

‘퍼포먼스’라고 일컬어지는 예술가들의 행위는 전시 공간 안에서 관객들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을 거부한다. 또한 퍼포먼스를 행하는 예술가들의 다수는 ‘예술’이라는 울타리 안에 갇힌 권위의식과 고정관념도 거부한다. 그들은 스스로 관객과 동등한 입장이 되어 그들과 호흡하기를 원하며, 관객들이 자신의 작품을 완성시켜 주기를 바란다. 독일에서 한 관객이 백남준의 퍼포먼스를 보고 이것은 예술이 아니라며 비난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긴 하지만 지금은 퍼포먼스가 매우 보편적인 형식으로 자리 잡았다. 이제는 예술가들이 미술관 안에서 테이블을 차려놓고 식사를 해도, 춤을 추거나 노래를 해도 관객들은 화를 내지 않는다. 혹 화를 내는 관객이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퍼포먼스는 그것이 행해지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돌발적인 상황들을 예술의 일부로서 껴안는다. 존 케이지는 침묵의 4분 33초 동안 일어나는 모든 우연적인 상황들이 그 자체로 온전한 하나의 음악이라고 여겼다.

만약 광장과 거리를 가득 메운 불빛들 역시 음악이라면, 이 음악은 웅장함 가운데 조금은 늘어지고 음산한 음률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좀 더 일찍, 그러니까 304명의 아이들과 어른이 배 안에 갇혀 가라앉는 것을 지켜보았던 바로 그때, 뜨겁고 치열한 음악을 바로 울렸어야 했다. 많은 예술가들과 활동가들이 그 날의 상황을 기록하고 고발하기 위해 즉각적으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들의 치열한 노력이 오늘날의 큰 강물을 형성하는 데 분명 몫을 해냈겠지만 많은 이들이 촛불을 들고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으로 인해 그들이 약간이라도 안도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시간이 지난 후 그들의 육성으로 들어야 할 것 같다. 어쩌면 필자와 같은 나약한 이들에게나 이 음악이 시리게 들릴 뿐, 여전히 분주한 연주자들에게는 뜨겁고 치열하게 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침묵의 4분 33초. 음악과 강물은 장소를 가득 채우며 오로지 흐른다. 그 방향을 정확하게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할지라도 음악과 강물은 어디론가는 흘러 새로운 상황들을 빚는다. 존 케이지의 음악은 절대 비관적인 음악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무한한 인정의 음악이다. 당분간은 광장과 거리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을 차분하게 감상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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