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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소망의 순서

 

격랑 속에서 또 한 해가 저물어간다. 온 나라를 흔들다 못해 수렁에 빠뜨릴 것만 같았던 사건의 연속이라고 해도 세월은 언제나 같은 보폭으로 걷는다. 그런데 올 연말은 다른 때와는 뭔가 다른 것 같다. 언제나 들리던 캐롤도 들리지 않고 설렘 가운데서도 한 해를 돌아보게 하던 교회의 성탄 트리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인근 교회도 십자가 등만 쓸쓸하게 어두운 하늘을 지키고 늦은 밤 취객들의 욕설이 섞인 떠들썩한 목소리도 모두가 깊은 침묵 속으로 가라앉고 세상에는 두 여인과 그의 측근들만 남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성탄 트리 대신 촛불에 눈길이 향하고 캐롤이나 송년모임을 하는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얼어붙은 경기에 움츠러든 자영업자들의 하소연이 대신한다. 병신년, 얼핏 욕설처럼 들리는 그래서 매사에 더 조심해야 한다고 하던 2016년이 이렇게 역사 속으로 묻히고 있다.

스포츠센터 로비에는 조화 벤자민 화분이 진짜보다 더 파릇한 자태로 사시사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을 매달고 각자의 소망을 하나씩 적어 붙이도록 했다. 처음에는 썰렁하던 나무가 색색의 종이가 달리면서 제법 예쁘게 변해간다. 나도 준비된 여러 가지 모양의 조그만 카드를 하나 집어 들고 소망을 적으려고 했다. 그런데 떠오르는 소망이 너무 많아 잠시 망설였다. 우선 우리 가족들의 건강하고 맡은 일 잘 하기를 바라는 내용으로 적었다. 그러나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아 다시 우리나라가 하루 빨리 정국이 안정되고 국민들이 행복하게 해달라고 적었다. 이내 다른 카드를 또 하나 집었다. 우리나라는 내가 살고 있는 남한 땅으로 한정짓는 것 같아 한반도에 평화가 임하기를 바란다고 적어 금색 끈으로 떨어지지 않게 잘 매달았다. 그렇지만 우리 같은 소시민들의 근심을 덜어주는 사람들은 결국 정치권의 영향이 제일 크다는 생각에 위정자들의 올바른 생각과 국민을 위해 헌신하는 마음을 갖게 해달라는 소망도 매달린다. 그래도 여전히 마음 한 쪽이 빈 것 같아 다시 이산가족을 위해 또 죄인들의 회개를 위한 카드를 매달았다.

전기스토브에 자그마한 귤을 올려놓고 어머니와 남편 세 식구가 아침식사를 한다. 길건너 공터에 쌓인 눈을 보며 이렇게 따뜻한 곳에서 가족들이 함께 식사를 하는 일상이 행복이고 감사할 일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가 새삼 마음에 닿는다. 겨울마다 나를 괴롭히는 감기를 떼어내기 위해 약을 먹고 따끈해진 귤을 뒤집는데 문소리와 함께 훌쩍 키가 큰 군인이 들어온다. 티브이에서 눈 오는 광경을 보고 추운 날 눈 고생하는 전우들이 생각나 만류하는 부모님을 뒤로하고 일찍 왔다고 하면서 웃는 얼굴이 싱그럽고 대견하다. 매일 보는 우리 군인들을 빼먹다니 평소에는 내 기도 제목 동메달 안에는 꼭 들었는데, 아무래도 이번 소망의 순서는 처음부터 어수선하고 두서가 없긴 했으니까, 기왕 순서가 틀린 김에 내가 쓴 소망카드에 번호를 붙이면서 아예 일번으로 할까? 내일 새벽에는 꼭 군인들을 위해서 카드를 달아야겠다.

“나 죽기 전에 어서 어서 군인 없는 세상이 왔으면...” 옛날에 동생만 업으시면 혼잣말처럼 하시던 우리 할머니 말씀이다. 내 소망은 어떤 차례로 자리를 바꾸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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