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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정조의 건축]융릉과 정자각은 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나?

 

사도세자의 묘(융릉)에 가보면 특이하게 묘와 정자각이 일직선에 있지 않다. 현장에 있는 문화해설사의 이야기를 빌어보면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어두운 가운데 답답하게 죽었기 때문에 묘소는 답답함이 없게 정자각을 옆에 세웠다.”란 이야기를 전하고 있지만 해설사의 말에 궁금증이 생긴다. 정자각에서 제사를 지낼 때 북쪽 문을 통해 봉분이 보여야 하는데 정자각이 지금처럼 한쪽에 치우쳐져 있으면 봉분이 보이지 않고, 또 봉분과 정자각의 높이 차이가 있어 봉분에서 보면 정자각이 시야에 잘 들어오지 않은 만큼 답답함은 없는데 정조의 진짜 뜻은 무엇일까?

1789년 7월11일 금성위 박명원(정조의 외삼촌)이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자고 상소를 올리자, 정조는 앞으로 이장에 적합한 풍수가를 뽑고자 회의를 한다. 신하들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풍수가를 추천하지 못하자, 정조는 관청에 소속된 사람으로 이명구 및 성몽룡 그리고 수원에 사는 유생 김양직 등 3명을 직접 호명하여 선정한다. 이들은 사전에 대기하고 있었던 것처럼 바로 들어와 명령을 받고 배병산에 있는 사도세자의 묘를 가서 관찰하고 좋은 곳이 아니라는 의견을 똑같이 낸다. 하지만 다음날인 7월12일 수원에 봉표된 자리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의견을 내는데, 김양직은 계좌론(癸坐論)을 성몽룡은 축좌론(丑坐論)을 전개한다. 이에 정조는 이들의 해석보다 더 깊은 이론을 전개하면서 “기해의궤(효종국장도감의궤)에서도 수원의 자리는 계좌정향를 언급하고 있고, 계좌로 하면 앞의 두 봉오리 사이의 빈 곳을 정면으로 향하면서 구슬같은 봉우리를 마주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왕자(王者)의 자리다.” 하면서 김양직의 이론에 힘을 실어준다. 정조는 이곳을 가보지는 못했지만 이미 많은 공부를 하여 두 풍수가보다 깊은 내공을 보여주고 있다.

정조는 처음부터 수원에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이곳이 반룡농주(盤龍弄珠, 용이 구슬을 희롱하는 형국)라는 기록 때문이다. ‘정조대왕 행장’에 정조의 태몽은 아버지 사도세자가 꾸었는데 “신미년 겨울 장헌(사도)세자 꿈에 용이 여의주를 안고 침상으로 들어왔었는데 꿈속에서 본 대로 그 용을 그려 벽에다 걸어두었더니 탄생하기 하루 전에 큰비가 내리고 뇌성이 일면서 구름이 자욱해지더니만 몇십 마리의 용이 굼틀굼틀 하늘로 올라갔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글에서 보듯이 정조와 사도세자는 용으로 연결되어 있고 용은 바로 국왕을 상징하는 동물이기에 국왕이 되지 못한 아버지를 용의 자리에 모시고자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룡농주의 자리에서 여의주는 중요한 요소인데 사전에 공부하지 못한 신하들은 구슬의 중요성에 대해 아무도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였다. 그리고 정조가 이 자리는 구슬이 보이게 조성해야 의미가 있다는 의견에 다른 의견을 내지 못한다.

7월13일에는 직제학 정민시(1745~1800, 정조의 즉위를 도움)가 정자각의 위치를 다른 곳에 세워도 좋다는 의견을 내자, 정조는 “혈성이 낮고 평평한데 정자각이 가운데에 있으면 안산을 마주하는 시야가 비록 가로막히지 않더라도 명당의 기운이 통창함이 부족할 듯 하니 형세 상 좌우로 이동해야 한다.”고 답을 한다. 7월18일에도 정자각 위치에 대해 논의가 계속되고, 봉분에서 볼 때 구슬이 잘 보이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한쪽으로 옮길 것을 주장하나 용인 현령 이지원은 정자각을 세우더라도 높이 차이가 있기에 앞이 보인다고 하면서 다른 답을 한다. 정조는 계속 다른 신하들에게 질문을 하게 되고 결국, 동부승지 김이성은 ‘명당(明堂)의 한가운데에 세울 것 없이 오른쪽의 여기(餘氣)가 있는 땅으로 조금 밀면 순전을 완전하게 하고 명당을 비우게 되어 좋을 듯합니다.’라며 정조가 원하는 답을 하고 정조는 바로 결정을 하여 정자각은 서쪽에 치우치게 된다.

정자각을 한쪽으로 옮기면서까지 정면을 비운 이유는 안산인 구슬같은 봉우리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고 또 이 봉우리을 구슬처럼 보이기 위해 나무를 심지 말고 잔디만 심어 항상 밝게 드러나 쉽게 볼 수 있도록 섬세한 부분까지 지시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정조가 중요하게 생각한 구슬 같은 봉우리가 인지되지 않고 있어 아쉬움을 자아낸다. 세계문화유산의 조선 왕릉이 이제는 현상유지보다는 그 속에 담고 있는 의미를 되살리는 작업이 필요할 때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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